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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Sep 05. 2023

꿈 이야기

사는 이야기

꿈을 꾸고 나면 허무해진다. 나 자신이 무척 단순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주변인들이 나타나고 나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내가 가진 욕망을 투사하는 것으로 서사는 진행된다. 두려움과 불안을 기반으로 한 꿈이 대부분이다.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학적 기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 모든 꿈은 깨어있는 동안의 정신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는 뜻깊은 심리적 형상물로 드러난다고 했다. 자연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 마성적인 것이기에 꿈도 신이 보내는 것이나 신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마성적인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즉 꿈은 초자연적인 계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과 유사한 인간의 정신 법칙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꿈에서는 어떤 기준도 없다. 깨어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을 재료로 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거의 욕망과 현재와 미래의 불안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내가 자주 꾸는 꿈은 이직하기 전의 회사로 다시 돌아가는 꿈이다. 텅 빈 사무실에 나 혼자 자리에 앉아 믹스커피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블랙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그날 해야 할 일의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실험실로 들어간다. 전날까지 실험했던 쇳덩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더러워진 현미경을 닦으며 자리에 앉는다. 전날 결과를 내지 못한 실험을 다시 시작하며 각오를 다진다. 도가니에 열을 올려 내용물을 첨가하고 성분을 조작한다.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모은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성취감을 느끼며 최종 합격 성적서를 만들어낸다.


그 순간의 기분은 롤러코스터의 꼭대기에 잠시 멈출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날 리가 없는데...’라는 불안감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로 내 마음속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로 그때 우당탕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본다.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회사 사람들이다. 그 회사의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이직한 후 만나게 될 회사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의 꿈속까지 마음대로 헤집어 놓는다. 그들이 실험 장비들을 때려 부수면서 나는 꿈에서 깬다. 이직한 지도 6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같은 꿈이 간헐적으로 반복된다. 꿈에서도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나 보다.     




 그다음으로 자주 꾸는 꿈은 반려묘 옹이에 대한 꿈이다. 옹이는 1년 전 뇌종양으로 죽었다. 옹이가 죽기 전에 나는 거짓말로 두 달간의 병가를 얻었었다. 최선을 다해 그 녀석을 돌보고 간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나는 옹이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마치 내가 낳은 자식처럼 정성을 다했다. 아니, 사람에게는 주지 못할 순수한 사랑을 옹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사랑 만으로 녀석을 지킬 수는 없었다. 두 달간의 힘겨운 투병 끝에 옹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은 안락사를 권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동물을 고통 속에 오래 두지는 말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주사를 맞은 옹이는 잠이 들었다. 잠든 옹이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화장터에 들고 가는 날, 옹이의 무게는 영혼이 빠져나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털의 감촉은 아직도 내 손에 남아 있다. 그렇게 8년을 함께 지냈던 페르시안 고양이 옹이는 내 곁을 떠났다.


 옹이가 떠나고 나는 보리와 함께 살고 있다. 옹이를 떠나보낸 기억 때문에 보리가 아프거나 죽을까 봐 자주 두렵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 가는 길에 키웠던 동물들이 마중 나온다고 한다. 그 길에선 동물들도 말을 할 수 있어서 가는 길에 말동무가 되어준다고 한다. 나는 옹이를 볼 그날이 기다려진다. 만나게 되면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꿈에라도 옹이를 만나면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옹이가 나오는 꿈은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포장 길을 걷던 나는 문득 찝찝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멈춘다.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아서다. 불안한 마음으로 발밑을 내려다보면 죽은옹이가 내 발아래 놓여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옹이의 하얀 털과 푹신한 살의 감촉 너무 생생하여 나는 소리를 지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옹이 말고도 아주 많은 고양이 사체들이 널려있다. 죽은 고양이들의 사체 위에 겁에 질린 채 나를 바라보는 보리가 보인다. 그렇게 꿈을 깬다.      


 그러면 나는 다음날 보리를 데리고 동물 병원에 간다. 꿈속의 보리가 날 쳐다보던 불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해서이다.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확신으로 바꾸려 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현상을 꿈의 심리학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떠한 심리학적 특수성이 이렇게 꿈을 낯설게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이는 꿈의 왜곡 작용과 관련 있다고 했다. 옹이의 죽음이 보리의 죽음으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직접 꿈을 꾸면서도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도 하고. 잠을 자면서도 주변의 상황이나 신체 상황을 꿈에 반영하기도 한다. 꿈은 자신만의 일을 하고 있다. 꿈은 터무니없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이 꿈을 꿀 때마다 나는 누운 채로 보리야! 하고 부른다. 그럼 소파에서 잠자던 보리가 침실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검은 포도 젤리 모양의 보리 발바닥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듣는다. 눈을 번쩍이며 보리는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온다. 한참 자느라 몸이 데워진 보리는 품에 안겨 코만 차가운 얼굴로 내 볼에 비빈다.

 보리가 따끈하게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드는 새벽도 있다.      




 그다음 꿈은 아내가 사라지는 꿈이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잦다. 평소 충전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 탓에 배터리가 방전돼 있기 일쑤이다. 현실에서 그렇게 자주 연락이 두절되는 아내는 꿈속에서도 똑같이 사라지곤 한다.   


 꿈속의 나는 공연장에 있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객석에 나 홀로 앉아있다. 공연이 끝난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다려도 안 올 거라는 불안감에 압도당한 채 그러나 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살짝 열린 입구 사이로 새어 들어온 불빛을 보며 막연히 아내가 곧 들어올 거라 기대힌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들어오지 않는다. 이윽고 그 문이 닫히면 공연장은 시커먼 어둠으로 바뀐다. 그렇게 나는 어둠 속에 남고 아내는 사라진다.


 그런 꿈에서 깨면 카톡 메시지가 왔는지부터 확인한다. 꿈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내에게 답장이 왔을 거라 기대한다. 그게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눈물을 닦으며 스마트 폰을 확인하곤 한다. 다행히 현실에서 답장이 왔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풀어졌다.  

    

 한겨울 대학로 서울대 병원 앞에서 스마트 폰이 꺼진 아내를 막연히 기다린 적이 있다. 2시쯤에 온다는 아내는 4시가 되어서야 카톡이 왔다. 회의가 길어져 늦어졌고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다는 것이다. 나는 입을 비죽거리며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답장을 썼다. 꿈에서처럼 아내가 사라지지 않았음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불안이 가라앉았다.     




 꿈은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여주는 영상 같아서 나는 최대한 과학적으로 꿈을 접해보려 한다.

 델뵈프는 꿈에서는 심리적 활동이 저하되고 여러 관계들이 이완되어 마다한 재료가 빈약해진다고 했다. 즉 수면은 정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외부 세계와 격리시킬 뿐 아니라 그 메커니즘 속으로 뚫고 들어가 때때로 정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이 꾼 꿈에도 영향을 받는 존재인가?     

 나는 가끔 내 상상력을 뛰어넘은 꿈을 꾸기도 한다.




 올해 초에 꾼 꿈이었다. 다리 하나를 두고 세계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탁 트인 전망이 보이는 유리벽의 카페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검은색 테이블과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고 전경엔 검정 파도가 유리창을 부술 듯 부딪치고 있다. 테이블마다 커피 잔이 놓여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검정 옷을 입고 검정 모자를 쓴 직원이 검은 빛을 띠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가져온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 얼굴을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유니폼을 말끔히 입은 할아버지는 말없이 커피를 두고 사라진다.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 가본다. 여러 종류의 꽃들이 모여있다. 다양한 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습을 가진 꽃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받고 있다. 꽃들 사이로 여러 개의 비석이 보였다. 색깔은 채도가 낮은 회색이었는데, 꽃들은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어렴풋이 그들이 나의 과거와 미래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나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스마트 폰을 꺼내 카메라로 꽃들과 하늘을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꿈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꿈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보고 싶었던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깨고 나서 금방 잊어버리는 꿈을 사진으로 찍어둘 수 있다면 현실의 앨범에 소중히 간직할 수 있을 거란 말이다.

 유난히 빛나는 비석 하나가 사라지더니 카페에서 보았던 할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할아버지와 악수를 하면서 꿈이 깼다.


 깨어나서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안정감과 든든함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꿈을 선택할 수 있다면...

 꿈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이 따스한 느낌이 1년 간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꿈을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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