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었다. 스트레스를 한 번 받으면 거기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정신이 그 상황 속에 멈춰 있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성격이었고, 심지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가끔씩 다시 상기시키곤 했다.
이런 불편한 성격 때문인지 나는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몸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식은땀이 난다거나 손이 떨린다거나 이를 악문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 스트레스가 내 정신까지 잡아먹어 망상 장애까지 온 적도 있었는데, 그때가 편집적 조현병을 앓았던 때였다.
처음에 조현병이 왔을 때,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당시 청와대의 주인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고른 남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무작정 청와대 내지는 박 대통령의 안가(안전가옥)를 찾아 나섰다. 청와대 앞에서 진입을 시도하던 나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에서 나는 정부 비밀조직이나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올 거라 생각하고, 신호를 포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뒤늦게 경찰서로 달려온 엄마의 동의하에 서울 은평병원에 강제 입원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무슨 신적인 존재나 정부조직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그들의 신호를 받고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TV나 사람들의 말소리를 신호나 메시지 삼아 반응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예를 들어, 까라는 끝 글자가 나오면 사람을 발로 찼다. 그렇게 한 결과, 나는 좀 더 강한 약을 먹게 되었고, 입원기간도 몇 주 더 늘어났다. 매주마다 피를 뽑아 검사한 뒤, 약을 조절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은 음악 치료, 문학 치료, 그림 치료 등 다양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음악 치료였다. 음악 치료는 치료사 선생님께서 가져온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환우들이 저마다 자기가 먼저 노래를 부르겠다고 해서 치료사 선생님이 난처해하기도 했었다. 반면, 나는 내 순서가 오면 노래를 불렀다. 내 목소리가 중학교 소년 같은 얇고 특이한 목소리여서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님." 하면서 자주 나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나는 그게 또 관심의 표현이라 생각해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이크를 건네받아 들고 노래를 불렀다.
하루는 음악치료사 선생님이 인순이의 '우산'이라는 곡을 가져오셨는데, 음과 가사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우산이 되어 지금의 힘든 시기를 이겨낼 거라는 다짐. 하얀 벽돌 안에 갇혀 오늘, 내일, 과연 언제 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나간다 해도 과연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 병원밥을 먹으면서 지내고 있는 우리 정신과 환우들에게 현실이 따뜻한 햇빛처럼 다가올까. 그래도 그 시간만 해도 각자의 병을 이겨내 보겠다고 다짐했던 우리들이었다. 정말 펑펑 울면서 목청이 터져라 불러댔던 것 같다. 그때 부른 노래들이 나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줬던 걸까. 내 병세는 차츰 좋아졌고, 얼마 뒤에는 퇴원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에도 나는 지금까지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서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있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찌할 줄 몰랐지만, 지금 나에게는 약이 있고 노래가 있다. 스트레스 왕창 받은 날에는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거나 마음에 드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한참을 듣는다. 그러고 나면 스트레스는 저만치 사라져 버리고 없다. 나만의 스트레스 조절 방법이 생긴 것이었다.
이제 내게 노래는 없어서는 안 될 생존기술이 되어 버렸다. 노래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가, 노래와 함께 잠드는 하루가 행복하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응원해주고 위로해준 노래가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은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