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기 시작했다. 텃밭에 심은 모종도 어느새 쑥 자라 매끼마다 초록 밥상을 풍성하게 안겨주었다. 앵두알 따서 입안에 쏙 집어넣고 보랏빛 까만 물 잔뜩 묻히며 오물오물 오디를 씹어 먹는, 유월은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얘들아, 나가서 매실 따자"
몇 해 전 심은 매화나무에 매실이 주렁주렁 달렸다. 개복숭아 나무에도 열매가 한가득이다. 봄에는 분홍빛 고운 꽃을 선사하더니 이제는 풋풋한 열매가 달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온 식구가 마당에 나 온 일요일 오전, 다 함께 매실과 개복숭아를 땄다. 열매 따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일부러 키운 게 아닌 자연이 만들어준 선물이니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아이들도 신이 났다. 둘째 지오는 잎에 붙은 딱정벌레랑 노는 게 더 재미 난지 연신 나뭇잎을 뒤적거리며 벌레랑 숨바꼭질을 한다.
“엄마, 이것 좀 봐”
자랑스러워하는 아이 손바닥에서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예상보다 많은 양을 땄다. 저울로 달아보니 매실과 개복숭아 모두 십 킬로나 되었다. 작은 솜털이 가득한 개복숭아 열매는 박박 씻고 매실은 휘리릭 한 번만 씻어서 효소를 담갔다. 우리 몸 이곳저곳에 좋다는 효능이 알려지면서 야생 개복숭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난 주말에는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동네 산에 있는 개복숭아 열매를 털다가 주민들에게 딱 걸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걸 거저먹을 수 있으니 자연에게 고맙다는 인사가 절로 나온다.
“엄마, 한결이 오빠네 집에 오디 많대. 그거 따먹으러 가자.”
이번에는 오디를 따러 갈 차례다. 한결이네 오디 밭은 전에 살던 집 근처에 있다. 집 밖으로 나와 언덕길을 조금만 오르면 한결이 아빠가 가꿔 놓은 오디 밭이 나온다. 마음껏 따먹어도 된다는 후한 인심 덕분에 이사 오기 전에 여러 번 따먹었다. 오디 잼도 만들고 효소도 담그고, 얼렸다가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먹었다. 야트막한 나무에 아이 엄지 손가락 만한 오디가 달려서 이맘때면 내 발길을 유혹했다. 아이들이 입 안 가득 오디를 욱여넣고 오물거렸다. 입 주변과 옷은 이미 오디 물로 새까매졌다.
언덕길을 내려와 커다란 밤나무에 매달린 그네를 탔다. 훅 하고 밤꽃 냄새가 풍겨왔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하얀 밤꽃이 폭죽처럼 꽃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달콤했던 아카시아와 찔레꽃은 땅으로 돌아갔다. 담장 밖으로 수북한 꽃송이를 드리웠던 불두화도 다 떨어지고 나니 밤꽃이 피어났다.
시골에 내려온 첫 해에는 냉이도 구분하지 못했다. 냉이를 캔 다고 나가서 지칭개를 잔뜩 뜯어왔더랬다. 몇 년간 산딸기 꽃을 찔레꽃으로 알았다. 이제 달마다 무슨 꽃이 피고 지는지 알고, 찔레꽃 질 때쯤이면 모내기가 얼추 끝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맘때면 아이들 손잡고 동네 곳곳을 누비며 열매를 따먹어야 하는 시기라는 것도.
그네를 타고 전에 살던 집 마당으로 가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앵두나무를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햇살을 받아 빨간 보석처럼 반짝이는 앵두가 잔뜩 달려있었다. 아이들 손이 닿지 않길래 가지 하나를 붙들고 앵두를 따주는데 둘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엄마 왜 지오만 많이 따줘. 이번엔 나만 줘.”
“안돼. 나도 먹을 거야. 나린이 언니는 욕심쟁이!”
퍽 하고 언니의 주먹이 지오 얼굴로 날아들었다.
“으앙 으앙 언니가 때렸어.”
일곱 살, 다섯 살 자매는 틈만 나면 티격태격 싸워댄다. 오디 물에 앵두즙까지 더해진 아이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저녁나절이면 텃밭을 돌보고 마당에 난 풀을 뽑는다. 텃밭에 물을 주고 고추 순과 토마토 곁가지를 잘라 주었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도 밖은 여전히 환하다. 오늘은 서쪽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었다.
“엄마, 산책 가자.”
저녁 바람은 선선하고 아직 모기도 많지 않아 걷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집안일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 범바위 쪽으로 접어들면 탁 트인 초록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이 붉은 노을 속으로 냅다 뛰어간다. 어슴푸레 사라지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 년 전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맺고 땅으로 돌아가는 사이 아이들은 쑥 커버렸고, 우린 이렇게 다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년에도 이 길을 걸으며 같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 서서히 잦아드는 어둠의 깊이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방에서 개구리울음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밤꽃 향은 짙어지고 여름도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