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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Sep 15. 2020

여문 알밤처럼 가을은 깊어가고


후드득 툭 툭

가을이 떨어진다.

연둣빛 작은 열매가 자라 어느새 입이 쩍 벌어지더니 단단한 껍질 속에 봉인해 둔 열매를 냅다 뱉어낸다.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허공에서 툭. 비탈진 벼랑을 추르르 굴러 내려오며 툭 툭, 토실하게 여문 밤송이들이 날마다 뒷마당에 쌓여간다. 네 귀퉁이로 쪽 벌어진 입 속에 사이좋게 붙어 있는 알밤 세 알. 갈라진 껍질 사이로 흘끗 세상을 엿보는 아가들 같다.

안 보면 그냥 지나치련만 쌓여가는 밤들이 자꾸만 뒷목을 잡아끈다. 수확하고 갈무리하기 바쁜 시골 살림, 손을 대자면 끝이 없다. 귀촌 초기에는 철마다 해야 하는 일들을 마치 살림 교본 마스터하듯 모조리 따라 하느라 몸이 후덜 댔다. 이제는 나에게 필요한 것만 가려할 줄 아는 지혜가 생겼다. 올해 못했으면 내년에 시도해 보는 여유도 함께.   


처음 몇 해 동안은 밤 줍는 재미에 빠져 잔뜩 모으기만 했다가 벌레가 꼬여 그대로 버리기 일쑤였다. 몇 번 까먹고 삶아 먹고 말면 딱 좋으련만, 뒷산 밤나무들의 후한 인심 덕에 가을이면 우리 집 뒷마당은 가시 박힌 갈색 융단을 겹겹이 깔아 놓은 꼴이 된다.


동네 할머니들처럼 산밤을 주워 모아 묵을 쑬 엄두는 못 내도 오래 보관하며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이맘때면 꼭 하는 갈무리 중 하나가 바로 밤조림이다.   


너희들을 모아 모아 맛 좋은 영양 간식을 만들어 보겠어!


‘리틀 포레스트’ 만화책에서는 속껍질 그대로 베이킹소다 한 스푼을 넣고 12시간 물에 담근다. 그 밤을 약불에서 30분 동안 끓이면서 위에 뜬 속껍질과 불순물을 수시로 걷어낸다. 다시 찬 물 붓고 끓이고 불순물 제거하기를 서 번 반복하며 맑은 와인색이 될 때까지 삶아준다. 삶아놓은 밤 무게의 60% 정도 설탕을 넣고 중불에서 졸인다. 국물이 절반 정도 줄어들면 여기에 와인이나 럼주 한 스푼과 간장 한 스푼을 넣고 더 졸여준다.


복잡하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냥 속껍질 까서 한 번에 졸여 먹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몇 해 전부터 읍내에 있는 한 마트에 밤 까는 기계가 등장했다는 고급 정보를 얻었다. 모아 둔 밤을 갖다 주면 오천 원 정도에 밤을 까 올 수 있다. 속껍질이 조금 남아 있지만 겉껍질은 말끔히 까진다. 까 온 밤에 조청이나 설탕, 간장을 조금 넣고 졸인 다음, (내 요리 사전에 정확한 계량이란 없다. 그냥 눈으로 대충)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 냉장 보관하면서 야금야금 꺼내 먹는다. 기다림과 정성이 있어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지만 그러기에 가을은 너무 짧고 할 일은 많다.


밤조림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에피소드 하나. 5년 전 어느 가을 아침 풍경이다.


두 딸이 서로 뒤엉켜 쌔근쌔근 자고 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

'아참, 지오가 어린이집에서 주워온 밤을 오늘 아침에 먹겠다고 했지?'


감자볶음을 하면서 밤을 삶았다. 다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일 큰 밤을 반으로 갈라보았다. 접시에 밤을 담고 나자 씩 웃는 얼굴로 지오가 기지개를 켜며 나왔다.


"지오야, 밤 삶았어. 엄마가 숟가락으로 떠줄게."


거기까지는 참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찐 밤이 몰고 온 파장이 그렇게나 클 줄 몰랐다.

 

"으앙, 내 밤. 내 밤"


갑자기 지오가 대성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찐 거야."


 "으앙, 으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아예 누워서 발버둥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주파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건 어미 잃은 짐승의 처절한 울음과도 같았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안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안기만 하면 작고 매운 두 손과 발로 내게 엄청난 스매싱을 날렸다. 한참 뒤에 쉰 목소리로 울먹거리며 이유를 말했다.


"솔바람(어린이집 선생님)이 힘들게 딴 건데 엄마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게 제일 큰 밤인데 엄마가 잘라 놨잖아. 원래대로 해 놔. 으아앙~~ 엄마 미워. 엄마 바보 멍청이"


아이는 쉬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다 불같이 화내고 ('저 까질하고 예민한 년') 다시 달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삶은 밤을 다시 원래대로 해 놓으라는데, 그건 자기가 잘라 놓은 인형 머리카락을 다시 붙여달라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한참 뒤에야 아이의 의중을 깨달았다. 전날까지 반질반질 윤이 나던 생밤이 푹 찌고 나자 윤기와 생기를 잃었고, 허락 없이 제일 큰 밤을 반으로 가른 것. 그것이 문제였다.


"엄마, 당장 어린이집 가. 가서 솔바람한테 밤 다시 따 달라할 거야."


"엄마가 가서 많이 주워줄게."


"엄마는 싫어. 당장 옷 입혀 줘.”


그 길로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까지 걸어갔다. 마침 솔바람이 밤나무 아래서 밤을 줍고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상황을 전해 듣고 솔바람이 울고 있는 지오에게 말을 건넸다.


"지오야, 이거 너 줄라고 또 주웠어."


그 밤들은 다 엄청 크고, 참기름을 바른 듯 좔좔좔 윤기가 흘러넘쳤다. 그제야 울음을 뚝 그치고 배시시 웃던 지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주운 밤을 입으로 갈갈 갈 까먹으며 오던 아이들, 반질반질 광이 나는 알밤을 보물처럼 여기던 아이들은 이제 길가에 떨어진 밤을 돌멩이 보듯 한다. (그때는 돌멩이도 꽤 많이 주워왔었지) 나와서 밤 좀 줍자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나중에 크면 ‘리틀 포레스트’ 영화 속 주인공처럼 엄마의 밤조림을 기억할라나? 찬바람 불면 숙성시킨 밤조림 꺼내 먹으며 이 에피소드를 들려줘야겠다.


블루베리와 오디를 졸여 잼을 만들고, 밭에서 딴 토마토로 퓨레를 만들고 나니 여름이 갔다. 지난 주에는 유월에 담갔던 매실을 거르고 오미자를 따서 효소를 담갔다. 내일은 청귤청을 담그고 다음주에는 밤조림을 만들어야지. 그러고 나면 아주 든든해 질 것 같다. 매년 가을에 복용하는 종합 비타민 같은 일들이다.

이렇게 또 한번의 가을이 여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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