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어디 갔노“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벚꽃잎이 흩날렸건만…. 어느새 길거리의 나무들이 죄다 먹지도 않는 푸르른 풀때기 냄새만 풍기고 있다. 서울에서 맞이하는 첫 봄이라 그런가? 이렇게 존재감 없는 봄은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니, 사실 봄은 그대로겠지. 봄은 원래 빠르게 지나가니까. 서울이든 내 고향 하동이든 겨우 350km의 거리인데 고작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바뀐 건 봄이 아니라 ‘나’뿐이다. 물론 ”니가 이제 와서 뭔 봄타령이냐?“라고 말하면 좀 뻘쭘하긴 하다. 평소의 나는 감성이 1도 없는 척 오지게 가오를 부리곤 했거든.
하지만 구차하게 변명할 말은 많다. 왜냐고? 내 고향 하동은 봄이 가장 유명한 동네였으니까.
"혁아! 좀 나와 본나!"
급식 판을 후벼파먹던 학창 시절. 3월이 되면 아버지께서 매일같이 부르셨다. 산에 가서 감나무를 관리하고 재첩국을 포장해서 판매해야 했다. 그 모든 일은 봄이 오자마자 시작된다.
‘귀찮노.’
철없는 잼민이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 아닌가.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일이 즐겁다고 하셨지만, 나는 아니었다. 항상 귀찮아하는 내 몸뚱와 싸우며 아버지께 갔었다. 아무리 해도 즐겁지가 않았고 힘들었다.
그렇다고 봄에 대한 힘든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하동이 또 벚꽃으로 유명한 동네잖은가. 사방팔방에서 날아다니는 벚꽃이 끝내준다. 만개한 벚꽃을 등지고 매화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 우화등선을 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때의 나는 콜라 한 캔으로 만족해야 하는 잼민이었지만. 논알콜로도 감성이 자극될 정도의 화려함이 존재했다. 부모님과 함께 벚꽃길을 드라이브하고 있으면 중2병같은 사색에 빠지곤 했으니 말 다했지.
이 외에도 ‘봄’에 대한 수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족들과 같이 장난치며 재첩을 게렸던 기억(게리다는 고르다의 경남지역 방언이다. 여기서는 뱃작업을 통해 끌려올라오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오로지 재첩만 분류해내는 작업을 뜻한다.), 여자친구와 난리를 쳤던 기억, 벚꽃축제로 교통이 막혀서 학원을 못 갔던 기억 등등…
그렇게 내 기억속의 ‘봄’은 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매일 내가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그건 사실 다 가오부리려고 일부러 한 말이다. 사실 나는 봄을 꽤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느껴진다. 아무리 서울이라도 벚꽃은 쉽게 볼 수 있건만, 벚꽃이 진 것을 인식조차 못 했다니. 봄이 왔다 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진짜 감성이 매마른 거겠지. 어느 순간부터 내 눈에 들어오는 벚꽃나무는 그저 버스 창가에서 스쳐지나가는 건물 1과 동일했을 뿐이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화려한 벚꽃은 온데간데 없고 푸른 풀때기만 보인다.
‘이게 서울 생활인가? 아니면 내가 변한걸까?’
고작 직장인 8개월 차. 햇병아리 주제에 뭐가 그리 고되다고 벌써부터 노땅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개덥노...“
벌써 여름이 와버렸다. 내게 봄이 왔다갔음을 알려주는 건 그저 축축해진 겨드랑이 뿐이다. 뭐가 문제일까? 어째서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벚꽃을 발로 찰 여유가 없었을까? 평범한 직장인의 삶에 만족감을 느꼈던 탓일까?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남들 다 이렇게 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무료해지는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뭔가 아쉽다.
‘재미없다.’
하루하루를 그저 무덤덤하게 보내면 재미없잖은가. 주말을 고대하는 직장인처럼 계절을 고대하면 그나마 덜 심심한 1년이 될 테니까.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걸어봐야겠다. 벚꽃은 다 떨어졌지만, 아직은 봄의 끝자락이라고 우겨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