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혼자 다니는 사람의 속내는 제각각이다. 그 수많은 이유 중에서 혼자 산에 다니는 사람의 대부분이 수긍할 만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산에 오르는 속도가 서로 맞지 않아서이다. 서로의 걸음걸이를 맞추어 산에 오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주말이나 시간이 나면 나는 주로 등산을 다녔다. 별다른 특기가 없는 나에게 등산은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취미였다. 주말에 혼자서 등산 다녀오는 일이 미안해 아내와 7살 아들을 산으로 끌고 갔다. 맞다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후 두 번 정도 같이 산에 오르고 지금까지 온 가족이 등산하겠다고 마음조차 먹은 일이 없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가족과 함께 오르는 산길의 시작은 너무나 행복하다. 문제는 행복은 시작과 함께 너무도 짧게 끝이 나고 뒤이어 고통의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아내와 아들은 산에 오르는 고통을 자진해서 찾아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고통 뒤에 내 몸에서 만들어지는 엔트로핀을 갈급하는 중독자였다. 그 이후로 등산이 아닌 다른 운동을 같이 시도했으나 매번 엔트로핀 중독자는 홀로 날뛰었고 아내는 뭘 해도 과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철인 3종 선수라도 될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나 또한 등산 고수나 전문 동호회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차원이 다른 엔트로핀 중독자들이다.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내와 나는 삶의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아내와 나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속도가 맞는 일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나는 점점 느려지고 기운이 쇠해가는데 아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내의 속도에 맞춰 걷는 길이 이제는 오히려 편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아내와 나는 산에 가는 대신 주말에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같이 걸으려면 자기만의 속도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나와 같이 걷는 사람이 지치면 같이 쉬어주고 그만 걷자고 하면 그만큼에서 멈추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만 멈추자고 말을 꺼내는 사람은 계속 가고자 하는 나에게 미안해하며 어렵게 꺼낸 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책이 한때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왜 호응을 얻었는지 알 만한 글들이 실려있다. 그런데 난 요즘 들어서 속도가 더욱 중요해 보인다. 그 속도를 맞추지 못해 수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방향은 삶을 관념으로 채우지만 속도는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속도는 삶 그 자체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되돌아보면 방향은 늘 옳았는데 속도가 문제였다. 너무 빨리 도달하고픈 욕심 탓에 오버페이스로 주저앉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강에서 속도를 즐기는 라이더와 바람을 즐기는 따릉이는 모두 행복하다. 앞서 달리는 라이더를 보고 따릉이가 시샘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만의 속도로 한강을 달리며 즐긴다. 그러나, 삶의 실체는 이처럼 아름답지도 순조롭지도 않다.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자기만의 속도와 여유를 상기하는 일이 마치 주문을 외우는 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검은 월요일의 폭망 한 주식을 보며 나는 또 주문을 외운다. 올여름의 폭염이 숨구멍을 막아도 그래봐야 한 두 주이면 더위가 꺾일 것이라며 하루를 보낸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따분하다기보다 괴롭지 않으면 행복이라는 말에 수긍하고 감사한다. 불어난 체중을 관리하며 평생 이렇게 건강을 챙기다 사는 일이 인간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잠시도 하루도 멈추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던져져 살아가는 모습에서 시지프스 신화 탄생의 전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럴수록 삶의 속도는 참 중요하다. 내 속도대로 살다가 나보다 느린 사람 만나면 조금 기다려 주고 빠른 사람 만나면 먼저 가라고 손짓하며 가던 길 가면 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내 옆에 나와 속도를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가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