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갑곶돈대의 순교자와 부역자
강화도(인천시 강화군)는 1970년 강화교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쉬워졌다. 이후 노후화된 다리를 대체해 1997년 강화대교가 새롭게 개통했다. 이렇게 왕래가 쉬워지면서 강화도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가 됐다. 강화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갑곶돈대이다. '곶'은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땅, '돈대'는 작은 보루에 대포를 배치한 관측 및 방어시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곳에는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거기에 휘말린 죽음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장소였더라도 그 죽음들이 현재 기억되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적 행위로 처형된 '순교자'
강화도는 예로부터 수도 서울의 '목줄'로 불려 왔다. 강화도를 통과하면 한강을 따라 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과 프랑스 등 외국이 우리를 압박할 때마다 강화도부터 공략했다.
1871년, 강화도 앞바다에 미국 군함이 나타나 교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군은 실제 강화도에 상륙해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다. 신미양요라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 조선군은 수백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미군은 불과 세 명의 전사자가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매우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래서 미군은 이 전투를 당시까지 동아시아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치열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군과 전투 중이던 4월 24일께에 부평도호부사 이기조가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 그 내용은 미국 배에 일부 조선인들이 길 안내자로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영종방어사 역시 세 명의 조선인이 적군의 배에 타고 있다는 보고를 추가로 올린다. 이에 고종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을 말하는 자는 매국의 죄로 다스리라'라며 크게 분노했다.
보고서에 나온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종과 조정은 그들을 천주교도로 단정 지었다. 거기에는 병인양요(1866년)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때문에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조선 땅이 더럽혀졌으니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수많은 교인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이후로 천주교도들은 서양 침략자들의 '내응자(內應者: 적 또는 외부와 남몰래 통하는 사람)'이자 '서양 오랑캐를 인도해온 근원이기에 뿌리까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신미양요 당시 미군함에 타고 있던 조선인 역시 자연스럽게 천주교도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5월 6일에 정박해 있는 미군함을 살피다 붙잡힌 이연구 형제가 제물진두에서 처형당했다. 특히 이들의 처형은 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진행됐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시위의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 세 명의 천주교 신자가 붙잡혀 강화도 갑곶돈대에서 처형당한다. 이들이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이유였다. 당시엔 미국 군함에 왕래한 사실 자체가 이적 행위였고, 천주교도의 매국 행위였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단지 신앙의 문제로 미군함을 왕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확실하지는 않다.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는 이들이 희생된 갑곶돈대의 부지를 매입해 2000년에 기념성당과 순교자 삼위비 등을 세우며 순교성지로 꾸몄다. 그리고 이곳은 아름다운 풍광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천주교인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적 행위로 처형된 '부역자'
한국 전쟁 초기, 빠른 속도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강화도 역시 점령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이 다시 북진하여 강화도를 탈환하였다. 이렇게 인민군이 주둔했다 퇴각하던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강화군 내 11개 면의 약 60여 명의 주민이 처형당했다. 학살의 주체에는 인민군을 비롯해 내무서원과 지방 좌익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은 친일 경력이 있거나 태극기 소지, 직업, 우익 활동 등으로 인해 반동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이후 국군이 강화도를 탈환했지만 주민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밀려온 중공군에 의해 국군은 다시 후퇴를 해야 했다. 1951년 1월 4일 후퇴를 전후로 강화도에서는 다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이 일어났다.
이때 민간인 학살의 주체는 1950년 12월 창설된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강화특공대)'로 43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군경은 강화특공대에 무기 등을 지원하면서 준군사조직으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군경 역시 민간인 학살을 묵인, 방조, 독려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간인들은 강화경찰서와 면지서 등으로 끌려가 고문당한 뒤 갑곶나루, 월곶포구, 철산포구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이런 민간인 집단 학살은 강화군 12개 면에 걸쳐 조직적이고 폭넓게 일어났다.
학살의 이유는, 이들이 인민군 점령 시기 부역했거나 부역 혐의가 있기 때문에 후에 다시 인민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인 협력자도 있었겠지만, 힘없는 민간인 입장에서 점령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은 고려되지 않았다. 실제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이들은 이미 대부분 인민군과 함께 철수한 뒤였다.
430여 명 중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건 139명이었다. 이중 부역혐의자의 가족이 83명(60%)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여성이 42명이고(30%), 10대 미만이 14명(10%)였다. 거기에 부역 혐의로 이미 사법 처벌을 받은 출소자도 8명(5.8%)이 있었다. 이처럼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자신들의 억울함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크지 않은 강화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는 물론이고, 강화특공대 전우회는 그동안 민간인 학살을 강력히 부정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강화군 길상면에 희생자들의 묘지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323명의 위패만이 모셔져 있고 나머지 희생자들은 위패조차 모시지 못하고 있다. 이 묘지 비석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충격적이게도 일가족 전체가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희생자 중에는 17 가족 53명이 포함돼 있다.
순교자와 부역자
갑곶나루 순교성지 바로 옆에는 폐쇄된 다리가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장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를 알리는 것은 표지판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관리가 되지 않아 몹시도 낡았고 찾기도 쉽지 않다.
1871년 천주교도들은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고 이들은 '순교자'가 됐다. 1951년 민간인들은 적에게 협조했고, 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빨갱이'가 됐다.
한쪽은 크고 아름다운 성지로 조성돼 수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끊임없이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은 낡아빠진 표지판 하나에 의지한 채 잊히고 있다.
천주교가 순교자를 기리는 모습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운 성당과 대비되는 초라한 표지판을 보고 있으면, 이런 당연함조차 허락되지 못하는가 싶어 마음이 서글퍼진다.
천주교도들은 건물을 지나면서 경건하게 합장한다.
갑곶 부역혐의 희생자 안내문은 그냥 지나친다.
추모는 추모하는 단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 같다.
교회조차도!
(최태육,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작가들, 152-153쪽)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방상근(2014), <인천지역의 천주교 박해와 제물진두 >, 누리와 말씀(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35: 37-65
월간조선, <정부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니 대한민국이 포격당해>, 2011. 1.
인천투데이, < '위패'도 없는 강화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 2020. 7. 29.
조광(2016), <병인박해 그리고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순교>, 한국기독교와 역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45: 5-24
진실화해위원회, <강화(강화도, 석모도, 주문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강화지역 적대세력 사건>
최태육,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작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