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6사단 7연대의 첫 승리와 민간인 학살
한국 전쟁 초기 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한없이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군은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중 한국군의 지상전 첫 승리는 1950년 7월 초 충북 음성과 충주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상대로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충주 신니면에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동락전승지가 있다. 2016년 충청북도와 충주시는 다소 초라했던 이곳에 새로운 전승비와 조형물을 건립하고 주변 정비를 완료했다.
동락지구 전투의 전개
6사단은 7월 5일부터 7일까지 이 일대에서 인민군과 교전을 펼친다. 그러다 7월 7일 북한 인민군이 동락리로 들어온다. 이때 동락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재옥(당시 19세, 여)은 인민군에게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는 정보를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인민군들은 제대로 된 경계도 없이 군기가 많이 풀어진 채로 동락초등학교에 주둔한다.
이 당시 국군은 부용산 일대에서 대기하며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데 부대로 한 여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몇 시간 전 인민군에게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는 거짓 정보를 준 김재옥이었다. 김재옥은 한국군에게 와서 인민군이 현재 동락초등학교에 주둔 중이며 그 경계태세가 매우 허술하다고 제보한다.
이 제보를 바탕으로 7월 7일 오후 5시께 한국군 6사단 7연대는 동락초등학교 약 300미터 전방까지 진군한다. 그리고 곧이어 초등학교를 향해 박격포를 쏘며 기습을 가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에 당황한 인민군은 급히 후퇴했다. 다음 날 오전까지 이어진 이 전투는 300여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이 2천여 명 이상의 인민군을 격퇴한 대승으로 마무리됐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수많은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는데 그중에는 소련제 무기가 다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의 한국전쟁 참전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초기 패전을 거듭하던 한국군에 동락전투의 승리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부대 전원에게 1계급 특진과 포상금이 내려졌다. 하지만 전선 전체가 남쪽으로 밀리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6사단 역시 승리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전선을 유지하며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첫 승전의 이면, 민간인 소탕
6사단은 인민군과 교전을 펼치기 전 전투에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을 사전에 정리했다. 그것은 좌익 성향 민간인, 즉 보도연맹원의 대량 학살이었다. 여러 증거와 증언, 연구 결과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되듯이 보도연맹 가입자가 모두 좌익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보도연맹은 최초에 좌익 경력을 용서해주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포용하겠다며 만든 단체였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명도 국민은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그런데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넓은 아량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행정 관료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기 위해 기를 썼다.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3)의 초반 장면에도 이은주가 보리쌀 한 되를 준다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당시 보도연맹원 모집은 그 본질보다는 더 많은 인원수를 채우기 위한 충성 경쟁이었다.
충주경찰서 동량지서에서는 보도연맹원들에게 신분증과 수첩 등을 배포했다. 그런데 이때 실제로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의 신분증에는 지서 도장을 거꾸로 찍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신분증에는 도장을 바르게 찍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본다면 보도연맹원을 모집하고 관리했던 관련 당국 역시 모든 보도연맹원이 좌익 사상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그 가입 경로가 어찌되었든 보도연맹원은 모두 위협요소로 간주되어 정리 대상이 되었다. 충주에서 전투를 펼쳤던 6사단 역시 지역 내 보도연맹원을 소집한다.
동락전투가 있기 직전인 7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6사단 7연대 헌병은 충주경찰서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각 면 단위로 소집이 이루어졌지만, 일부 면에서는 소집이 진행되지 않기도 했다. 보도연맹원 소집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은 살미면이었다. 쌀 2되씩을 가지고 모이라는 명령에 70~80명의 사람들이 살미면사무소 마당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충주경찰서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
당시 충주에는 춘천, 원주 등지에서 이송된 보도연맹원들도 있었다. 이렇게 모인 보도연맹원들은 ABC 세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은 바로 처형할 사람들이었고, C급은 풀려날 사람들, 그리고 B급은 그 중간으로 재분류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분류는 6사단 헌병대를 비롯한 지휘부 참모 장교들이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보도연맹원들을 타지로 이송하지 않고 이곳에서 '종결'하기로 합의한다.
최종적으로 A급으로 분류된 인원들은 6사단 7연대 헌병에 의해 학살당한다. 대표적인 학살 장소는 싸리고개 일대였다. 증언에 따르면, 헌병들이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와서 싸리고개로 올라가 대여섯 개의 구덩이를 파고 총살했다고 한다.
현재 싸리고개 학살현장은 건국대학교 글로컬 캠퍼스 후문 건너편의 야트막한 야산 일대이다. 또한 싸리고개 외에도 수안보 등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충주지역 민간인 희생자는 총 19명이다. 하지만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시 싸리골 구덩이에만 100여 구 이상의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자는 희생자가 73명이라고 했다.
이렇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와 차이가 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진실규명 조사가 신청자에 한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례로 충주시 엄정면은 좌익 세력이 강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보도연맹 가입자 역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기간 중 이곳에서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수십 년 간 유족들을 억눌러왔던 빨갱이라는 강력한 굴레 때문에 진실규명 신청을 회피한 것이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신청할 유족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일가족이나 마을 전체가 희생당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 중에는 갓난아기부터 일가족 전체가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
전쟁 중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합리화
한국군 6사단 7연대는 전쟁 기간 중 지상전 첫 승리라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민간인 학살이라는 범죄도 함께 저질렀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 발생한 이런 민간인 학살을 두고 전쟁 중 위협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봐도 되는 걸까?
우크라이나는 과거 오랜 기간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다. 이 때문에 가족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흩어져 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러시아에 우호적인 성향의 주민들도 다수 존재한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친러 성향의 반군이 존재하며 정부군과 내전을 벌여왔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 직전 한반도 상황과 꽤 비슷하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자국 내 친러 성향 주민들을 제거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분명히 엄청난 비난이 일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국민을 향한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는 이렇게도 넓은 아량을 보여주는 것일까? 모든 일에는 공과 과를 구분해 함께 다뤄야 하고 그 시대적 배경 역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깨끗하게 조성된 충주 동락지구 전승공원에 비해 싸리고개의 현재 모습은 잊히고 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적법한 절차 없이 이루어진 자국민 학살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이는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연합뉴스, <'6.25 첫 승전'.."동락전투를 아시나요">, 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한국전쟁 첫 승리 '동락전투' 승전비 제막…성역화 완료>, 2016년 7월 7일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보도연맹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