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사건, 그 의의와 한계 1 - 지난한 피해 구제 과정
한국전쟁 전후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중 대중에게 처음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거창 사건'일 것이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사건은 소문으로만 떠돌던 민간인 학살이 사실이라는 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만큼 정부의 진실규명 방해 역시 매우 노골적이었다.
'지리산 킬링필드'가 된 거창군 신원면
1951년 2월 5일, 한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거창군 신원면에 들어와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군수물자를 운반한다. 그리고 얼마 후인 2월 9일에 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세 차례에 걸쳐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난다.
먼저 신원면 청연마을에서 한국군은 마을 주민 84명을 학살한다. 다음 날인 2월 10일에는 탄량골로 가서 주민들을 계곡에 몰아넣고 100여 명을 살해한다. 그리고 시체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얻고 불을 지른다. 이후 인근 여러 마을에서 끌고 온 주민 천여 명을 신원 국민학교에 감금한다.
다음 날 새벽, 감금했던 주민들을 박산골에 몰아넣고 총을 쏜 다음 시쳇더미에 불을 지른다. 이때 희생자는 517명이었다. 연행되던 와중에 희생된 18명까지 포함해서 사흘 동안 이 산골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확인된 것만 719명이었다. 이중 15세 이하가 359명이었고 60세 이상은 60명이었다.
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작전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전세가 뒤집히자 한반도 남쪽에 남아있던 인민군들은 퇴로가 막히게 된다. 이들은 지리산 등지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이렇게 규모가 커진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11사단이 투입된다. 이때 사단장이었던 최덕신 소장은 견벽청야(堅壁淸野)를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이 전략은 손자병법에 나오는데, 작전 지역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파괴하여 적군이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중국 국민당이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적용하면 민간인이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부대는 작전지역 내 모든 인원은 사살하고 건물은 모두 파괴하며, 식량과 물자는 후송하거나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군인들은 이 명령에 의거해서 산청과 함양을 포함해 작전 지역 내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건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
언제나 그렇듯 민간인 학살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가 뒤따랐다. 우선 대대장 한동석은 2월 13일 신원면 일대에 계엄령을 내려 통제한다. 하지만 거창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신중목에게 해당 사건에 대한 투서가 전달된다.
신중목은 군의 감시를 피해 사건 지역을 직접 다녀가고 현지 경찰들을 통해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1951년 3월 29일, 부산 극장(당시 임시 국회의사당)에서 해당 사건을 폭로한다. 사건을 조사하던 신중목은 군의 감시와 협박을 받았다. 그래서 국회 의장에게 비공개 회의를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사건의 진상을 공개했다.
이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국회는 3월 30일 곧바로 진상조사단을 꾸린다. 이는 1949년에 있었던 문경 석달마을 학살 사건과 함께 이승만에게 정치적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정부의 조작과 방해 공작이 일어난다.
국회의 신속한 움직임에 당황한 신성모 국방장관은 3대대장 한동석에게 현장 조작을 지시한다. 4월 3일, 한동석은 병력을 데리고 517구의 시신이 쌓여 있는 박산골로 다시 간다. 그리고 어린아이 시체 100여 구를 골라내어 인근 산골에다 암매장한다.
군은 계속해서 희생자들이 빨치산 동조자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조사단이 현장에서 상당수의 어린아이 시신을 보게 된다면 군의 거짓말이 밝혀지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어린아이 시체만 따로 빼 암매장을 했다.
이후 4월 7일, 진상 조사단은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산길을 넘어가던 중 알 수 없는 병력들이 총격을 가한다. 도저히 뚫고 지나갈 수 없어 조사단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군은 총격을 가한 괴한들이 지리산의 빨치산이라고 밝혔다.
사건이 크게 알려지고 외신까지 주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 어쩔 수 없이 담화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공비 협력자들을 군법에 의해 처형한 것이라는 뻔한 거짓말이었다. 이에 분노한 국회는 재조사에 착수한다.
이 재조사 과정에서 앞서 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한 괴한들이 11사단 병력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조사단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지역 계엄사령관이었던 김종원의 명령에 따라 한국군이 빨치산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관련자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긴다. 작전을 실제 수행했던 대대장 한동석은 말도 안 되는 작전 명령이라며 항의했다고 했으며, 연대장 오익경은 좌익 혐의자에 대한 사살만 명령했다고 주장한다. 사단장 최덕신은 자신의 견벽청야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는데 일선 지휘관들이 잘못 이해했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 연대장과 대대장은 무기징역, 계엄사령관은 3년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이승만은 1년여 만에 이들을 특별 사면한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탄압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군은 여전히 현장을 통제하며 시신 수습을 막았다. 결국 3년이 지난 1954년 4월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신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게 훼손된 상태였다. 유족들은 큰 뼈는 성인 남자, 중간 크기 뼈는 성인 여자, 작은 뼈는 어린아이로 구분해 화장해 매장한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과 이승만이 물러나자 유가족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국회는 여러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권은 이런 활동을 모두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탄압한다.
군사정권은 가까스로 수습한 유골을 안치한 박산 합동묘역을 두고 묘지법을 위반했다며 경남도지사를 통해 개장 명령을 내린다. 이는 개인적으로 유골을 가져가 매장하라는 것으로 합동 묘역의 철거를 뜻했다. 그리고 위령비는 정으로 비문을 훼손하고 파괴해 땅에 묻게 한다. 유족들은 이 사건을 '제2차 학살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국가
수십 년간 이어진 유족들의 싸움은 기억 투쟁이자 인정 투쟁이었다. 국가가 자국민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95년 12월,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된다. 2004년 10월에는 사건 현장 일대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완공된다.
특별법과 추모공원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창 사건이 완전히 해결됐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특별법에는 유족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 빠져 있었다. 결국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1심 재판에서는 유족들이 이겼다. 하지만, 2심 재판에 이어 2008년 대법원까지 모두 유족들이 패소한다. 패소 사유는 공소시효의 만료였다. 유족 측은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소시효는 사법부가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손해 배상 소송에서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이유였다.
사법부는 학살 부대 지휘관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1951년부터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을 곧바로 사면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주일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군으로 복직하거나 경찰 간부로 특채됐다. 이렇게 가해자들이 다시 권력의 품 안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어떻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까? 형식적이었던 과거의 유죄 판결이 훗날 손해배상 청구 기각의 근거가 됐다.
국제인도법에는 중대한 전쟁 범죄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이 원칙을 반영한 판결은 거의 없었다.
정부와 사법부, 국회의 섬뜩한 핑퐁게임
공소시효를 근거로 국가의 손을 들어주던 사법부가 또 하나 반복하는 것이 있다. 유족들을 위해 국회에서 피해보상이 들어간 특별법을 만들라는 권고를 판결문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야 사법부가 그 법을 근거로 피해보상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는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보상 법안 처리를 이미 수 차례 미뤄왔다.
이렇게 정부와 사법부, 국회가 핑퐁 게임을 하는 동안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은 지쳐가고 체념하며 세상을 떠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국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아닌지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김기곤(2009), <국가폭력, 하나의 사건과 두 가지 재현 - 거창사건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과정>, 민주주의와 인권, 9(1):27-63
김백영&김민환(2008), <학살과 내전, 공간적 재현과 담론적 재현의 간극: 거창사건추모공원의 공간적 분석>, 사회와 역사, 0(78):5-33
한성훈(2008), <기념물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와 집단 정체성-거창사건의 위령비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0(78):35-64거창사건추모공원(사건전개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