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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Nov 03. 2023

꽃씨 뿌리기

몇 해전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이런 말을 했다. 

"꽃길만 걷게 해 줄게요" 

그 이후로 한동안 우리는 꽃길만 걷는 삶을 염원했고, 부러워했다. 앞길이 꽃길만 있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온할지 막연하게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꽃길만 걷는 삶. 



얼마 전 시청한 불우한 삶을 살아온 드라마 주인공은 다르게 말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진흙길이라면 내가 꽃씨 뿌리며 걸어가 줄게!" 


비포장에 먼지만 풀풀 날리는 흙길을 걸으며 주인공은 꽃씨를 뿌리며 가겠다고 했다. 아마도 주인공은 그 길에 돋아난 새싹조차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뒤 따르는 누군가는 그 길을 꽃길로 걸어올 것이다. 


꽃이 피어있는 길, 그리고 꽃씨를 뿌리며 걷는 길. 



대학교 시절은 케이블 채널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지상파에 비해 인턴을 지원할 기회가 넘쳐났다. 학과 사무실로 인턴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뜻만 있다면 캐이블 채널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다. 내가 공부하던 고시반에도 인턴 지원서가 몇 장 도착을 했다. 어리석게도 난 꽃이 피어 있는 길만을 원했다. 막 태동하는 캐이블 산업은 그 당시 나로서는 마이너 채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불과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캐이블 채널의 위상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콘텐츠의 수준조차 지상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높은 퀄리티를 지닌다. 지금은 캐이블 채널을 입사하는 것이 지상파 못지않게 경쟁률이 치열하다. 지각이 움직인 것이다. 


꽃이 피어있는 길은 완성되어 있는 길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완성에 가까운 형태의 길이다. 좋아 보이고, 멋져 보이고,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다. 이정표도 잘 되어 있기에 그 길에 들어서면 길을 잃어버릴 걱정도 별로 없다. 


꽃씨를 뿌리는 길은 어떨까?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길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길을 내 발걸음으로 모양을 내고 흙을 일구어 가며 꽃씨를 뿌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정표조차 없어 구불구불 휘어진 길이 될 수 도 있다. 이것은 길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꽃씨를 뿌리는 길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까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이기에 그 앞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성공이 있을지 실패만이 있을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이른바 선도기업이 그랬다. 꽃씨를 뿌려가며 걸어간 길이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또 하나의 완성된 길이 되었다. 그 대가로 막대한 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이 되었다. 


인생이 어려울 때 왜 나는 꽃길만 걷지 못할 까 비관했던 적도 많았다. 왜 나의 길은 꽃길이 아닐까라고만 비관했는데, 왜 나는 꽃씨를 뿌려볼까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지금껏 비관하며 걸어온 시간에 꽃씨를 모으고 뿌렸다면,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을 때 지금쯤이면 작은 싹이 돋아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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