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준 Jun 20. 2024

가족 나이 합산 117살 빠르게 상승중

대한민국의 인구가 줄고 있다. 게다가 출산율도 낮아진다. 정부와 언론은 인구 소멸을 걱정한다. 온갖 미디어에서 미래를 걱정한다. 아이를 낳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비혼마저 유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22년도 기준 가임여성 1명당 평균 출산율 0.778명. 남녀 둘이 만나 가정을 이루어도 1명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소멸 중이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그 소멸을 막아내는 사람이 우리 가족이다. 우리 가족은 5명. 부모와 두 딸, 막내 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 국가 유공자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우리 부부는 10년도 결혼을 했고, 이제 곧 결혼 15년차가 된다. 나와 아내는 30대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으니 빠른 결혼은 아니다. 이듬 해에 첫 째를 낳았고, 막내는 그로 부터 8년이 지나 태어났다. 아내의 나이는 마흔이 넘은 때였다. 노산이었지만, 아이와 엄마는 모두 건강하다. 엄마가 젊은 시절의 출산이 아이와 아내에게 긍정적이라 걱정도 했지만 별 탈 없이 모두 잘 자라주었다. 오히려 막내 아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습득력이 좋아 뭐든지 곧잘 따라하고 있어 기특하다. 


아이들간의 나이차도 제법 있다. 모두 네 살 터울의 세 남매. 둘째가 태어날 때까지도 출산이 늦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막내가 대학을 갈 시기를 어림잡으니 이미 우리 부부는 환갑을 지나 버리게 된다. 좀 늙어버린 부모라 미안한 마음도 살짝 든다. 그때까지 아이들을 부양하려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자녀들의 부양과 우리의 노후를 상상하면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마저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고, 다가올 문제들을 대비하기 위해 차근차근 노력중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때때로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물론 쉽지 않다. 첫째를 키우고 둘째까지 잘 키울 자신이 없어 외동으로 결정했다는 옆동의 부부. 둘째를 낳으면 더이상 커리어를 이어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외동으로 만족한다는 뒷 동의 부부. 공감한다. 가끔 유치원 등하원에 만나 근황을 나누다 받는 질문.


"아이 셋 어떻게 키워요?" 그럼 우리는 말한다. 


"죽을 것 같아요 ㅎㅎ"


속내를 그대로 말하면 아이 셋 키우기 쉽지 않다. 무엇을 해도 외동에 비해 세 배이상의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필요하다. 단순한 계산법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결정이다. 아내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내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가 가장 깊은 사람이다. 아이들을 위한다면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안타깝니다. 사업을 하면서 육아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걸 아내는 한다. 보통의 남편들이 일에 바쁘면 육아와 일 중 어느 하나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아내는 그 두가지를 놓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다. 만약 나의 결정이었다면? 아마 두 아이로 만족했을 거다. 셋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우리 부부는 어렵다고만 하는 육아를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인간은 모두가 행복을 위한 결정을 한다. 옆동의 부부도 뒷동의 부부도 모두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이들을 더 낳지 않기로 결정한것이다. 그들은 그 길을 선택했고, 우리는 더 많은 아이들을 선택한 것이다. 각자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위치에 있을 뿐, 정답을 벗어났거나, 특이한 사상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행복의 기준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행복을 얻는 곳은 특별함에 있지 않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접하는 아주 작은 순간들이,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곤한다. 다둥이로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들은 넘친다. 모든 다둥이 집안이 불행하지 않고, 모든 외동 집안이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각자의 행복과 어려움은 모두 각자의 가정에 존재한다. 


다둥이의 생활은 이렇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습관이 생긴다. 세 명의 아이들은 외동처럼 대해주기 어렵다. 항상 손이 부족하다.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각자 스스로 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기다림에 지쳐 스스로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다. 첫째가 스스로를 돌볼 수있었던 시기보다 둘째가 빠르고 셋째는 그 시간이 더 빨리 찾아온다. 집안 내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많다. 막내는 첫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스스로 밥그릇을 챙기기 시작했고, 자신의 옷가지와 물건을 돌본다. 때로는 대견하기도 하고, 막내아이까지 세심히 돌보아 주지 못했음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이것도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 아이들은 뷔페를 가면 스스로 접시를 들고 먹고자 하는 음식을 챙겨올 줄 안다. 


집 안에서도 작은 사회가 생긴다. 세 명의 인원도 하나의 사회가 된다. 선배가 있고 후배가 있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볼보는 법, 후배로서 선배들을 따르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다. 제것을 나누는 법을 알며, 나의 순서를 기다리는 법을 익힌다. 아이의 기분만으로 집안의 일들이 결정되지 않는다. 외식 메뉴를 골라도, 어느 한 아이의 의견만을 따르지 않는다. 오늘은 큰누나의 선택, 다른날의 엄마의 선택, 때로는 막내의 선택으로 메뉴가 결정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기다림을 익힌다. 물론 아직 철없는 아이들이라 투닥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큰누나의 말을 따르고 동생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의 사회생활은 혼자 성정하는 아이들 보다 좀 더 유연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다둥이들은 외동아이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빠르게 사회 생활을 간접 체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 아이들 세의 밥상은 항상 부족하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무리 많이 준비를 해 두어도 넘쳐나지 않는다. 나의 속도로는 양껏 배를 채울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집이 음식의 양을 부족하게 준비하지 않는다. 다만 편식을 하지 않게 하기위해 좋아하는 반찬을 낭비할 만큼 올려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맛보려면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여야 한다. 외동의 간식은 줄어들지 않지만, 다둥이의 간식은 금방 사라진다. 다른 아이가 먹지 않는다고 마냥 기다려줄 형제들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든 음식을 먹을 줄 알고, 편식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아이들의 유아식에 많은 정성을 쏟았고, 매끼에 야채와 고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경험하게 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덕분에 알러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음식에 대한 편견도 없다. 먹는 문제로 걱정을 해 본적이 없어서 나는 모든 아이들은 과일을 잘 먹고, 간식을 잘 먹는 줄 알았다. 때로 간식도 잘 먹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또래 엄마들을 만날 때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서야 먹는 문제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새삼 음식을 가리지 않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생존 경쟁일 수 있다. 그런 경쟁 속에 아이들의 음식을 먹이는 일이 좀 더 수월 했다. 우리 삼남매는 해삼, 멍게, 산낙지 마저 즐기는 수준이다. 이것도 다둥이의 장점이라고 믿는다. 


정신적 노후가 좀 든든해졌다. 나는 외동이다. 외아들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후천적인 외동이다. 동생을 먼저 잃었다. 이제는 친가의 대소사에 대한 모든 책임과 의무는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 때로는 두렵다. 가족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마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이를 함께 나눌 형제가 없다. 아내는 4남매다. 와이프 역시 언니를 잃었다. 처가 식구들이 처형에 대해서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는 오롯이 나 혼자 머릿속으로 그리워한다. 부모와 나누는 그리움과 형제가 나누는 그리움은 다르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지금 내 처가 식구들이 그렇다. 가지가 많으면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도 있다. 사건 사고는 외동에 비해 더 많을 것이다. 불화가 많으면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기도 하다고 한다. 허나 형제가 없다고 세상 괴로운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형제들은 서로의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서로 거친 바람을 막아줄 날이 그 보다 더 많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다둥이는 키우기 힘들다. 손도 많이 가고, 돈도 더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는 10년 동안 육아만 했다며 투덜거렸다. 내 삶도 없어지는 듯, 나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는 육아인가 싶었다. 키워놓으니 좋다. 집안이야 늘 어지럽혀 있고, 하루 이틀만 미뤄도 빨래하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용돈을 주어도, 선물을 주어도 외동보다 세배는 더 들어간다. 아이들이 나쁜 것도 빨리 배운다. TV나 미디어, 게임을 접하는 시기도 또래보다 빨라진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이들을 키우는 내가 힘든 것이다. 아이들은 힘들지가 않다. 집에서 혼자 놀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 가면 가장 든든한 방패가 있으며, 무서운 밤길도 혼자보다 형제라면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을 수 있다. 철들면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아이들에게는 형제가 있는 것이 좋다. 혹 사고 치는 형제는 남보다 못하다고 하지만, 내 주변에 사고 치는 사람이 꼭 형제만은 아니다. 그런 일은 형제가 있건 없건 일어날 수 있다. 아이들은 형제가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성장하면서 느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다둥이를 키우셨는지 알게 될 거다. 지금의 추세라면 우리 아이들도 외동아이를 키우게 될 가능성이 크겠다. 그럼 3남매를 키워낸 니들 부모(?)의 고생에 대해 좀 이해하려나? 

이전 06화 라떼파파 꼭 하셔야 겠다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