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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l 19. 2024

나의 피곤함은 몇 등급?

장마가 물폭탄을 던진 날. 산 아래에 있는 아이의 유치원이 걱정되어 노파심에 아이를 가정에서 돌보았다. 창가에 앉아 퍼붓는 비를 바라보며, 뽀송한 집안에 있음에 서로 좋아하던 시간도 잠시. 에너지 넘치는 막둥이는 가만히 두질 못했다. 아이의 몸도, 장난감도 모두.


쉴세 없이 움직이고, 장난감을 꺼내어 가지고 놀다 또 다른 장난감을 찾으러 떠나고, 그림을 그렸다가 책을 읽었다가, 또 게임을 했다. 정말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무언가 놀거리를 찾았다. 에어컨에 실링팬까지 틀어놨지만, 아이의 이마와 목덜미는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큰 누나들을 보내고 기분 좋게 정리를 마치고 시작한 놀이는 결국 집안을, 정리하기 전 상태로 돌려놓는 마법을 부렸고, 시간은 벌써 오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며, 또 간단히 집안 정리를 다시 했다. 겨우 사람 사는 집이 되었다. 하루 종일 퍼부울 것만 같았던 비는 오후가 되며 조금 가늘어지고, 집 나간 학생들이 다시 귀가를 한다. 중학생 딸은 들어오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간식을 찾고 익숙한 듯 양말을 벗어젖히고는 패드를 손에 잡으신다. 신발, 양말, 가방, 순으로 지나가는 동선 동선에 흔적을 남겨두시고 맛나게 드신 간식은 무엇 드셨는지, 어디서 드셨는지 얼마나 남기셨는지 그대로 증거를 남긴다.


학원까지 마친 둘째가 더 늦게 집에 왔다. 역시나 형제다. 언니와 똑같은 폼으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가방을 던지고 간식을 찾는다. 첫째의 행동을 따라 배웠나 보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 하시니, 아마도 부모의 행동이 그런가 반성하게 된다. 암튼 집안은 정리하고, 치워도 곧 그 혼돈의 상태로 머문다.


우리 집은 집안 정리 혼돈에 대한 항상성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깨끗하게  집안을 정리하려 노력해도 금세 어질러진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어지러운 집이 기본값인 것 같다. 일단 아이 셋이 귀가한 이후로는 정리에 대해 포기를 한다. 내일 아침 다시 학교로 떠날 때까지 집 안은 지금처럼 혼돈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했듯이




그렇게도 하루에 몇 번씩 집안 정리를 하고,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몸이 좀 피곤하다.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기운이 없다. 이럴 때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젊고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들처럼 '오운완'을 달성한 것도 아니고, 체력 관리를 위해 몇 킬로미터의 조깅을 한 것도 아닌데 몸이 피곤하고 힘이 없다. 그렇다고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구겨가며, 참기 힘든 일들을 참아가며 돈을 벌어 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몸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다.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한 것도 아니고, 취미 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피곤함을 느끼게 되면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도대체 뭘 했다고 몸이 힘들다 하는 거냐


고 누가 물어볼 것만 같다. 아무리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해도 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집안일을 하여도 그 정도로 피곤하다 해도 될까 싶은 의심이 먼저 들뿐이다. 나의 힘듦과 피곤함을 받아들이기가 영 불편하다. 마치 엄살을 부리는 것 같다.  왜일까? 왜 집안일을 하면서 느끼는 피곤함은 좀 다를까? 


운동을 열심히 한 날은 왠지 모르게 무엇인가를 성취했다는 작은 만족감에 뿌듯한 피곤함을 느낀다. 힘든 사회생활을 하고 돌아온 어떤 날은 가족을 위해 참고 견뎠다는 당당한 피곤함을 느낀다. 그럴 때 느끼는 피곤함은 왠지 명분도 있고, 뿌듯함도 있다. 주변인들도, 안쓰러워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쳐 침대에 쓰러져도 당당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 최상 등급의 피곤함이다.


반면 낮은 등급의 피곤함도 있다. 스스로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기를 주저할 때 생긴다. 이것저것 열심히 많은 일은 하는데, 그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주부들이 그래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지도 모른다. 힘들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다. 아니다. 많은 주부들이라기보다 나만의 이야기다. 주부들의 이야기라고 뒤에 숨어보려 했는데, 종국엔 나의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집안 살림을 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어디다 말하기는 좀 그렇다. 왠지 최고 등급의 일을 하지 못하면서 피곤함을 느끼는 게 좀 죄스러워진다. 어쩌면 이런 것이 가장 낮은 등급의 피곤함일지 모른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아빠여서 그렇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당연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집안일에 대해 더 피곤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이 정도는 가뿐하고 언제나 활기 있게 처리해야 한다고 자꾸 스스로를 밀어 넣는지 모른다. 


그래도 만약 다른 주부들도 나와 같은 느낌이라면, 다른 주부들도 나처럼 피곤함이 좀 미안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어쩌면 현실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죄책감이 드는 피곤함이 정말 존재하는지 도 모른다. 그럼 덜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보통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했을 때, 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죄책감을 갖는다. 시험을 앞두고 밤새 놀았을 때처럼, 해야 할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처럼,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이다.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았는데도 죄책감이 든다. 내가 했던 일들 혹은 하지 않았던 일들 중에서 무엇이 나를 움츠러들게 할까? 내가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무엇들일까? 생각한다.


분명 가치 있는 일이며, 꼭 필요한 일인데. 왜 이 일로 자존감을 높이기가 이리도 어려운 걸까? 집안일은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하며, 곁가지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이 기분이 해소될 것만 같다. 정말 집안일의 가치는 하찮은 것일까? 


나만의 이야기 일지도 모르고, 많은 주부들의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결론으로 도달해야 할지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야기를 꺼내면 결론을 내야 할 것만 같지만, 나는 아직 결론짓지 못했다. 지금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개척할 용기도 부족한지 모른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은 우유부단한 스스로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는 셈이다. 아직 점심을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하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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