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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l 24. 2024

세상이 우리에게 친절할 이유는 없지.

머릿속이 삐쭉거리고, 묘하게 긴장된다. 천천히 행동하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선 비디오를 빨리 감는 듯 장면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머리 위의 생각들과, 나의 행동이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듯
몸과 마음이 다른 기어로 움직인다. 


내게 불안감은 이런 느낌으로 시작된다.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해 나가면서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자꾸만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 나는 분명 해내어 가겠지만, 그 과정의 스트레스에 또다시 힘들어할 것만 같은 모습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별일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두렵다. 나는 그저 평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내게 조금의 손해 따위는 충분히 감수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새치기를 하거나, 무리한 차선 변경 같은 일들은 그저 눈감고, 자리를 내어주는 편이다. 오죽 급했으면, 뭐 사고 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마인드다. 인간관계에서도 적당한 손해가 익숙하고, 네 것 내 것 나누기보다 내가 적당히 양보하고 내어주는 선택을 하곤 한다. 그럼 모든 게 편해진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언성을 높일 이유도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상상도 한다. 


그러나 사람일이라는 게 뭐든 일방적이지가 않다. 때로 나의 어떤 행동은 타인에게 이기적으로 보일 테고, 나의 행동으로 자신이 손해를 본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사실이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저마다의 이해관계는 각자의 몫이기도 하니까. 다만, 나는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인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받아 들지 못할까? 왜 저렇게 날카롭게 말을 할까? 라며 서운해질 때도 있다는 거다. 관대한 언행은 관대한 행동을 기대하게 된다.


나는 관대한데, 왜 너는 좁쌀 같으냐...


이런 아쉬움쯤 일수도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내 욕심이다. 공적인 일에서 일에 대해 엄격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럴 일이다. 나도 이런 영역에서 나의 욕심을 비추지 않는다. 이런 분야에서 서운할 일도 없다.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로 때로 서운함을 느끼곤 한다. 나는 타인을 관대하게 대하여 노력하는데, 왜 당신은 마음에 바늘 끝 하나 세울만한 여유가 없는가라고 따지고 싶기도 하다. 그리 살아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고도 말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타인과의 언쟁을 피하려 하는 내 성격에 머릿속으로만 샤우팅을 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내가 타인에게 관대하게 대했던 것은 어느 정도 보상심리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우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우하라고 배웠다. 나는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고, 타인에게 관대하게 대해지고 싶어 타인을 그리 대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타인도 나를 그렇게 대할 것이라 믿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나의 친절과 관대함은 대가를 고려한 전략적인 행위 인지도 모른다. 순수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얻기 위한 포석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의도야 어찌 되었던 나는 타인에게 관대하고, 여유 있게 대했다.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상대도 나처럼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돌이켜 내게 친절을 베푼 타인에게 그만큼의 친절로 되갚았는가 생각하면, 나 역시 내가 서운함을 느꼈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은것과는 별개로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했던 경험이 훨씬 많다. 


결국 나는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던 일로 서운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지만, 너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소리치고 있었던 셈이다. 타인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무례하지만 않으면 된다. 내가 그들에게 친절한 것과는 별개의 사항이다. 



왜 불안해야 하나?
무엇을 기대하기에?


나의 불안함은 그럼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바라기에 불안함을 느낄까? 결국 나는 세상에 대해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숨겨놓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 바람과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미래가 잘 될 것이라는 것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경험할 테니까. 모든 것이 잘 흘러가리라는 기대를 가져서 나쁠 것은 없지만, 불안감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나에게 친절할 리 없다는 시니컬한 기대가 더 나은 방법일지 모른다. 다가오는 일들의 결과는 항상 걱정했던 것보다 나아진다. 


세상은 내게 친절하게 대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나에게 행운이며 기억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기본값이라 믿는 친절이 자주 접하기 어렵고, 정말 행복한 기억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딱히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이것은 타인과 세상에 대해 기대치를 낮춰 스스로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행동에 가깝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스스로의 방어기제로 상처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순간도 있다. 상처받지 않는 것은 나를 회복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 에너지는 또 하루를 살아가는데 쓸 수 있다. 내가 불안과 걱정을 해소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은 내게 친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며, 
일어나도 최악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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