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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Aug 07. 2024

글을 쓰는 원동력 하나_분노

나는 그렇다. 내가 가장 글을 쓰고 싶은 순간은 내 안이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때론 나 자신에게서 실망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게 될 때 나는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다행이라면 내 글에는 그 분노를 100% 담아내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분위기나, 어조, 생각의 흐름이 맑고,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때로 나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좀 어둡다. 가라앉아 있고 무언가 시니컬하게도 느껴지곤 한다.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분노의 감정을 최대한 가려가며 글을 쓰지만, 글 쓰기의 원동력이 분노의 감정인지라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것까지 막을 도리가 없다. 


오늘 여백을 채우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다. 무언가에 심하게 상처를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 한동안 쓰지 못하던 글을 잡기로 했다. 덕분에 오늘은 한 편의 짧은 이야기라도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아이들 말로는 럭키비키인지 모르겠다. 이럴 때 써도 될 말인가? 



저마다 화를 표현하는 방법, 다스리는 방법, 해소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그전에 화를 느끼는 포인트 역시 각자의 몫이다. 뭐 하나 똑같은 사람은 없다. 부모 자식, 형제 자메, 부부, 친구, 동료들 어느 하나 나와 똑같은 포인트만을 공유하지 않는다. 


용은 81개의 비늘을 가지고 있다. 그중 목 아래 단 한 개의 비늘만이 거꾸로 자란다. 용은 누구든 그 비늘을 건드리는 사람은 세상 끝까지 쫓아가 화를 끼친다. 우리는 그 거꾸로 난 비늘을 역린이라 부른다. 역린은 누군가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 양보 불가한 부분, 지금 말로 발작버튼과 같은 부분이다. 각자는 각자의 역린을 가지고 살고 있다. 


문제는 각자의 역린이 다른 사람이 도통 알아채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트라우마라 부를 수도 있고, 상처라 부를 수도 있는 역린은 보통 감춰지게 마련이다. 자신의 약점이자 상처를 쉽게 드러내는 인간은 많지 않다. 만약 이 약점을 쉽게 오픈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그 상처에 내성이 생겨 극복의 단계에 도달한 인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상처와 약점이 타인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뭘 저것 가지고 그래?' '더 힘든 사람도 많아' '너만 상처받았니?' '내가 더 힘들겠다'와 같아 보일 수도 있다. 본인의 기준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이며, 그런 일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원래 타인의 고통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곤 한다. 그리고 큰 화를 경험한 후에야 그것이 그의 역린이었음을, 그의 발작버튼이었음을 깨닫는다. 


반복되는 상처를 풀길이 없을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하지만, 때로는 시간이 흘러도 더 선명해지는 상처도 있다. 대부분의 상처는 거짓에서보다, 진실에서 나온다. 어쩌면 잔혹한 진실이 더 상처가 되곤 한다. 그리고 진실에게서 상처를 받을 때는 쉽게 대항할 수도 없다. 진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 진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변명밖에 되지 않다 보니, 진실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아프다. 


진실이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기에 변화시키거나, 상태를 바꿀 수 있다면 해결이 된다.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하다. 팩트로 후드려 팬다면, 팩트를 뒤집으면 된다. "내가 했었다"는 팩트는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되고, "내가 하지 않았다"는 진실은 앞으로 하면 된다. 


내가 하지 않은 일들로 비난받는 것이 나에겐 역린이다. 아니 아직 않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과는 같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므로. 


비난받고, 노력하여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프로세스면 좋을 텐데, 때로는 그 과정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상대방을 서로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입하려 하다 보면 결국 톱니는 어긋나기 마련이며, 동시에 상처받는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그저 똑같이 상처받은 서로만이 남는다. 서로 자신만 상처받았다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후드려 팬 사람도 아플지 모른다. 맞은 놈은 더 아프겠지만.      



처음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의 저주를 한바탕 내려주고 내 감정을 해소하려 글을 시작했다. 그 누군가를 타박하고, 흉을 보고, 타인에게서 위로의 말을 듣게 되면 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싶어 글을 시작했다. 글을 시작하면, 타인에게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고, 글로 쓴 내 이야기는 그렇게 내 기분만큼 불공정하지도 않아 보이고, 그렇게 대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약간의 감정 정리는 된다. 문제는 미처 쏟아내지 못한 감정이나, 상처의 아픔은 오롯이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대패가 되어간다. 한 겹 한 겹 자존감이 벗겨내어 지는 기분이다. 이것 마저는 어쩔 수 없다. 


분노로 글을 쓰다 객관적인 나를 보게 되면, 수치스럽다. 좀 안되어 보인다. 그럼 그런 대상이 되는 것도 딱히 부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찌 되었던 그 분노의 원인은 팩트니까. 바라는 것이라면, 그 팩트가 사실일지언정 그런 표현은 아니었으면 하지만 엄밀히 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꿈을 꾼다. 팩트를 근사하게 뒤집어서 한바탕 쏟아붓는 꿈.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하게 입을 꽈악 막아버리는 멋진 일장 연설을 하는 꿈을 꾼다. 매번 몽상에만 빠져 현실의 팩트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 몽상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오늘 분노의 감정에서 글을 시작해 자존감을 한 겹 벗겨내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치유의 글쓰기일지, 자책의 글쓰기일지 모르겠다. 감정이 해소된 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의 잘한 점을 찾자면, 또 하나의 동기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용의 비늘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뱀의 꼬리에서 끝이 난 기분이다. 어쩌면 분노의 글쓰기의 단점은 분노의 감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끝맺음도 뱀의 꼬리마냥 스르륵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한 편의 이야기를 썼다. 완전 럭키비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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