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해가 질 무렵 어스름한 때는 저 멀리 다가오는 동물이 친구인 개인지, 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애매한 순간. 그 짧은 순간의 판단이 나를 위험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도광규는 딱 그런 어스름한 때 성준을 찾아왔다.
"자네 혹시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갈 일은 없을까?"
"뭐... 정말 심심하면 모를까.. 당장은 가고 싶진 않아. 그거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라고, 시간 맞춰서 약 먹듯 하는 것도. 왜? 갑자기"
도광규가 한참이나 어른 뻘 나이지만, 성준은 누구를 만나도 반말이 기본이다. 사람들도 성준과 트러블을 피하고자 그저 그러려니 내버려 둔다.
"나와 딜을 하나만 하는 게 어때?"
"풋... 아니 아저씨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길래 딜을 하재?"
"... 뭐 지금 당장 줄 수 없는 건 맞는데.. 그게 방법은 있단 말이지.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없는지 알아낼 방법!"
"뭔 소리야. 나 복잡한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쉽게 말하던지 아님 그냥 갈 길 가세요!"
"나랑 확인 한 번만 하자. 안개!"
"예~ 예~ 많이 하세요 안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성준은 도광규의 전직을 알지 못하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해 광규의 제안이 영 귀찮기만 하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날까 방법을 찾기를 원하는 성준에게 광규의 제안은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이게 확인되면, 우리 다 나갈 수 있어"
"... 뭐라고? 나갈 수 있다고?"
"뭐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방법만 알면 되는데, 첫 번째는 당신이 안개를 모았던 방법이 필요해 그렇게 대량을 안개를 모으면, 우리는 산아래에서 두어 시간마다 안개를 마시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 뭐 이론적으로는 그래"
"내가 그거 해봤는데 쉬운 일이 아냐. 두 시간에 한 번씩이라는 게.. 잠도 푹 못 자요. 자다가 죽을 듯한 통증에 깨는 게 뭐 그리 상쾌한 일인 것 같아? 두 시간마다 일어나는 게 쉬운 일인 것 같으냐고, 그거 며칠 하다 보면 여기 산이 그리울걸? 그나마 여기선 푹 쉬고 자고 다 하잖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셔 괜히"
"만약에 안개를 농축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알약처럼 만든다면? 하루에 한 알 혹은 두 알만 먹으면 되는 거야. 그 정도 매일 먹는 사람 수두룩해. 여기 들어온 사람들? 매일을 한 움큼씩 약을 삼키던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하루 두 번 알약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 해봐. 누구라도 다 여길 뛰쳐나가지"
"근데... 그게 가능하다고?"
"그걸 알아보자는 거야. 바로. 내가 이래 봬도 제약회사에 연구원이었어. 어떤 종류의 성분들을 농축하고, 농도를 높이는데 어느 정도 경험이 많다고. "
"그럼 당신이 알아보면 되겠네~ 근데 왜 나한테 그래?"
"아니~ 여기는 아무것도 없잖아. 기계도 없고, 장비도 없고, 너 바보냐? 이게 무슨 연습장이랑 연필만 있으면 풀 수 있는 수학문제인 줄 알아?"
"어? 어? 바보? 아저씨 말조심해. 나 안 가?"
"어.. 어! 그래 미안 미안. 암튼 아직까지 회사에 동기나 아는 사람이 남아 있을 거야. 그리고 남아 있다면 내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그 사람한테 가서 안개를 농축해 가공할 수 있는지 확인 좀 받자고. "
".... 그럴듯한데? 근데 그럼 나한테 뭘 줄 거야?"
"일단 이거 알아보자고. 생각해 봐 이거 가능해지잖아? 그럼 세상을 바꿀 수도 있어. 그 정도의 일인 거야. 그리고 안개를 모으는 건 지금 당신만이 하고 있잖아? 일단 굉장히 앞서고 있는 셈이지. 그러니 그 안개를 농축하는 것만 된다면.... 보상을 그때 가서 하자고."
성준은 설득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광규가 말하는 바가 틀린 점이 없다. 그 일이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절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한 가지 불확실한 것은 도광규 이 사람이 자신의 친구인지 적인지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성준은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쩡. 나 다시 산아래 갔다 올 거야. "
"왜? 무슨 일이야? 안 갈거라 하더니? 그나저나 이것 좀 봐봐"
남정희는 김호열이 안개를 챙겨갔다는 사람들의 의심을 끌었던 이후로 김호열의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무언가 단서라도 있을까 이것저것 단서를 모으려 했다. 예전에 김호열이 정희에게 남긴 말이 기억이 났다.
"정희야 혹시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집에 와서 내 일기장을 네가 챙겨줘. 어딘가 쓸 데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 일기장을 항상 그곳에 두니까.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찾으러 와."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아무래도 김호열도 이 일에 연관이 있거나, 무언가를 파헤치려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호열의 일기장은 싱크대 서랍 밑에 감춰져 있었다.
"이거... 누가 쓴 거야? "
"이거 호열 아저씨가 쓴 일기장이야.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챙겨달라고 나한테 예전에 부탁했었어."
"이 아저씨 뭐야... 도대체., 뭐 하던 인간인거지?"
그때그때 생각의 흐름대로 마구잡이로 적은 단어들이라 문맥 파악이 쉽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낯익은 단어나 이름들이 나왔다.
[택시기사, 희수, 안개, 싹퉁머리, 제약회사 연구원 도광규, 그리고 마지막 사람을 잘 살필 것]
"뭐야 싹퉁머리? 이거 혹시 내 이야기? 이 아저씨 보개 정말... 그나저나... 나 여기 도광규 부탁으로 나가는 거야"
"어디로.. 설마 제약회사로?"
"아마.. 그럴 거 같은데.. 어떻게 호열 아저씨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거지?"
"아저씨가 먼저 알아냈던가... 아니면 광규 아저씨가 먼저 접근했던가.. 일단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는 건데... 호열 아저씨 사라진 게 광규 아저씨도 관련이 있는 걸까?"
"확실하지 않지만, 의심스럽긴 해. 여기 생각보다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이구만.. 재밌어 짜증 날 정도로!"
성준은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김호열은 도광규가 제약회사 직원이었던 것을 안다. 당연하지 같은 주민이었으니까. 과거 이야기 하다 보면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택시 기사와 장희수라는 여자아이는 성도 같고, 생김새도 묘하지만 닮은 구석이 있다. 무언가 연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을 살펴라? 마지막 사람이라...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 들어온 순서를 말하는 걸까? 그럼 난데? 그런데 나는 이미 싹퉁머리라 했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마지막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 사람이 김호열 씨의 행방에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성준은 지금까지의 정보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도광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자신에게도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성준의 판단의 기준은 돈에 대한 욕심이기도 했지만, 위험한 일에서 얼마나 안전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 되곤 했다. 돈이 많아도 위험한 일에는 잘 뛰어들지 않았다. 그런 기준에서도 도광규의 일은 크게 잘못될 것들이 없어 보였다.
벌써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산속의 해는 빨리 저문다. 밤은 금방 찾아오고 길다. 해가 저무는 모습을 본적 오래되었다. 아니 매일 지는 해지만 해가 산속 숲 속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로 본 것은 오래되었다.
문득 성준은 왜 자신이 밖으로 나가려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고 쫓길 일도 없을 것이다. 평생은 평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자신을 쫓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며, 살아가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뺏었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일까?
그럼에도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직 그 이유를 말하라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김호열 씨가 식당 아주머니를 만났던 일이나. 남정희가 동창을 그리워하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곳이 말랑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저 남의 일이다. 착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추억 같은 거라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행복한 추억 따위는 없었다. 밖에 나가서도 공유할 추억도, 대상도 없다. 나에게는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직 성준에게는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아직 없다.
성준은 또 한 번의 심부름을 위해 가방을 다시 챙겼다. 어쩌면 이번의 심부름이 성준의 앞날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이제 밤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