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읽은 말이다. 인스타는 누가 누가 잘 사나, 브런치는 누가 누가 힘든가 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브런치 메인은 이혼과, 이별, 그리고 삶과의 투쟁에 관한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리고 그런 글들을 브런치 메인에서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브런치에는 고통에 관한 글들이 많은 것일까? 그런 류의 글이 많기에 메인에 노출되는 비율도 높은 걸까? 아니면 편집자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스크린 되어진 결과물인 걸까? 알고리즘을 밝힐 도리는 없지만, 브런치에 고통에 관한 글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고통을 글을 쓰려하는 걸까?
하기사 그러고 보면 내가 쓰는 글들도 많은 부분이 상실감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연유가 거기에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기 전에는 답답했다. 타인에게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누군가에게 나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나의 감정과 고통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잘 알지 못했다. 사람인지라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는 나도 모르게 원하는 반응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고통을 털어놓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나의 기대치와 어긋날 때면 나도 모르게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중간에 화제를 돌리기도 했었다.
대화는 상호 작용이다.
나의 이야기와 상대방의 반응이 만나 비로소 완성되며, 이는 매우 짧은 순간에 판가름이 난다. 내용을 전달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손짓, 몸의 자세등 비언어적인 모든 것들이 포함되는 순간이다. 시선을 피하고, 귀를 후비며 내뱉는 수려한 위로의 말은 전혀 마음속에 와닿지 않는다. 대화는 어렵다.
그래서 글을 썼다. 일기를 썼다. 그날의 감정에 대해서, 그리움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차근히 한 줄 한 줄 채워 노트를 긁어 나갔다.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차분하게 할 수 있어 좋았다. 상대방의 반응을 살필 필요도 없이 오롯이 나의 감정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어 좋았다. 대화의 여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그 시간은 내게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공백이 되기도 했다. 나누고픈 이야기를 고르고, 옮길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어떻게 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의 이 이야기를 오롯이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좋았다.
무엇이든 과하면 해가 된다.
집중하는 만큼, 나의 감정인 농도가 짙어졌고, 마치 사해처럼 짙은 소금물의 감정이 내 안에 차올랐다. 내 안에 있던 감정을 노트에 옮기는 작업을 통해 이야기는 정제되어졌고, 감정의 슬픔의 골은 더 깊어졌다. 내 안의 아픔을 희석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이 오히려 정제되어 농도가 짙어진 감정들을 글자로 남겨 두었고, 눈앞에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는 그 감정들은 다시 더 짙은 농도로 내 안으로 돌고 돌아왔다. 나는 글을 쓸수록 우울해져만 갔다. 세상에 내가 제일 불행하고, 불쌍한 그런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브런치에는 나보다 훨씬 불행한, 아니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며, 그래 나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세상에 이리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던가? 다 어디서 나온 것들일까 싶다. 그런데 그런 불행이 나를 살린다.
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저울질하는 것이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타인의 불행을 보면 나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큰 상실을 경험했지만, 그게 전부다. 배신을 당하지도, 이용을 당하지도,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사람은 참 가볍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 여겼던 이가, 타인의 글을 읽고, 나의 고통에 달린 댓글을 읽다 보면 나와 같은 일들이 매우 흔한 일이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나의 감정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무게감은 줄어든다.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더 건방져지면, 그런 고통을 극복한 사람의 글을 보며,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고 저 사람은 멋지게 극복하며 사는데 내가 왜?라는 동기부여마저 된다. 그렇게 삶은 살아진다.
고통은 나눠진다.
우습지만, 드러낼수록 표현할수록 고통은 가벼워진다. 내가 겪은, 각자가 겪은 일들의 중요함, 중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은 이미 벌어져버렸고, 결코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고통은 그 사실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사실 이후의 감정들이다. 그 사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감정들이다. 다행이라면,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고통과 상실을 경험한다. 내가 가족을 잃었다면, 누군가도 가족을 잃은 적 있고, 내가 배신을 당했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타인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거의 같다. 나의 삶이 타인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어쩌면 기대감이다.
특별하지 않은 나의 고난은 결국 누군가는 극복해 내고, 이겨 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면 나도 그럴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우주가 사라졌지만, 우주가 사라진 모양새는 모두 비슷하며, 그렇게들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글을 써 우리는 위로받는다. 단. 누군가 읽어준다면
농도가 짙어진 나의 감정의 글들을 누군가에게 읽히고, 그 반응을 얻는 것은 대화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비언어적인 메시지 없이 오롯이 글로 적혀있는 내용으로 위로받는다.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의 지루함을 걱정할 필요 없다. 글이 주는 간결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쓰고, 발행한다.
글로 써 고통은 나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