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준 Nov 15. 2024

상실이 일상인 시대

교실을 떠나는 선생님을 위해, 책상 위로 뛰어오르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미소 띤 얼굴, 중년의 피터팬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진함. 그리고 수백 년을 살아가며 기계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모습 속에서 보이는 인간성을 연기한 로빈 윌리엄스


88년도 대학가요제 우승으로 화려하게 데뷔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정신과 어법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마왕 신해철. 


선임병들에게 무려 35일간 집단 구타를 당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윤일병. 


그리고 세월호의 꽃다운 304명의 슬픈 영혼들. 



그렇다. 모두 2014년도 우리가 떠나보낸, 우리가 잃어버린 세상들이다. 

2014년도 우리는 로빈 윌리엄스도, 마왕 신해철도 윤일병도. 그리고 세월호의 304명도 모두 떠나보냈다

아내는 외할머니를 잃었고, 그해 겨울 나는 동생을 떠나보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었다. 


그 일들이 벌써 10년이 흘렀다. 동생이 떠나버린 11월이 되면 싸늘해지는 계절만큼 감정도 가라앉으며 습관처럼, 감기처럼 우울감을 앓고는 한다. 이제 제법 인이 박혀 버렸다. 인이 박혔다 해도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익숙해 질리 없다.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흉터가 옅혀질지 모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상실감은 우리의 감정에 흉터로 남겨진다. 



어린 시절엔 상실에 대해 잘 몰랐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해가 다시 뜨면 또 만나 함께 놀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고, 자라면서 헤어짐보다 새로운 만남이 많았다. 성장할수록 나의 세상은 넓어져갔고, 그만큼 관계하는 만남도 커져만 갔다. 매일 나의 세계는 조금씩 조금씩 확장되어 갔다. 상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익숙해진 일이 되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함께하는 평범함이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 동기의 모친상부터였는지 모른다. 동기는 나이가 많았다. 이미 군대도 제대한 나이 많은 형이었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 부모님을 여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를 때였다. 조문의 순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절을 드리고 위로를 나눠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할 때였다. 옆사람의 행동을 보며 어색하게 조문을 하고 상주에게 위로의 인사를 건넸다. 십몇 년이 지나 기억에 남는 것은 우습게도, 친구의 친척들이 우리 동기들 중 잘생긴 녀석을 칭찬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를 잃은 동기의 슬픔보다, 상실감으로 가득한 장례식보다 내 기억 속에는 동기의 모습을 칭찬하는 덕담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상실감은 익숙하지 않았고, 어색한 감정이었으며, 나에게 쉽게 와닿지 않은 일이었다. 


삼촌이 쓰러졌고, 동기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동생이 죽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더 이상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은 기억할 만한 이벤트가 되었고, 애를 써야 겨우 이뤄내는 일들이 되었다. 만남이 어려워지는 만큼 떠나보내는 일들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확장되던 나의 세계는 그만큼의 속도로 또다시 소멸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연한 일들일 진데 새롭기도 아쉽기도 또 그러려니 하기도 하다. 


그걸 느끼고 나니 지인들을 만나 묻는 안부에 좀 더 진심이 담기게 되었다. 정말 잘 지내는지, 정말 건강한 것인지 앞으로도 더 건강하기를 바라는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지금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가능한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도 하게 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들도 아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사고와도 같은 일들이 점차 많아져 익숙해질 뿐이다. 상실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십일을 붉게 피어있는 꽃이 없고, 모든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있다. 즐거움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사자성어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들을 겪는 일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상실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라 타인이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아이들이 전쟁과 기아로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더라도, 나의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의 상실감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안타까움과 상실감은 같지 않다. 타인의 고난과 나의 슬픔은 미묘하게 다르다. 상실감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타인의 위로로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사회의 우주에서가 아닌 개인의 우주 안에서 세상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나만의 우주가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상실을 경험한 인간은 개인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타인이 공감하지 못하는 개인의 우주가 무너졌고, 그 상실과 극복의 과정을 타인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믿는다. 우주가 조각이 나고, 그 대체불가결한 조각들이 사라졌을 때, 우리의 우주는 결코 원상복구 될 수 없다. 그저 이그러진 우주가, 비어버린 우주가 새로운 나의 세상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상실로 인해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 반가울 리 없다. 설레어할 일도 아니다. 

그저 또 눈앞에 주어진 또 한 번의 삶인 것이다. 

이그러진 우주가 일상이 되어도 우리는 또 그 조각을 잃어버릴 순간이 올 것이며, 그것은 앞에 겪은 일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들이며,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삶이다. 


상실이 일상이 되어가는 순간들의 여정.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인지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