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금 바로 머리 좀 다듬을 수 있을까요?"
약속 시간이 한 시간 반쯤 남았다. 집에서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하루 종일 일하며 부딯히던 머리는 어째 제대로 손질이 되지도 않는다. 밖에서 머리를 감을 수도 없고, 그러자해도 벌써 이만큼이나 자라 버린 머리길이가 꽤나 덥수룩해졌다. 생각난 김에 머리를 좀 다듬어야겠다고 아래 미용실을 찾았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지금 머리 정리 좀 부탁드리고, 이왕이면 예쁘게 세팅도 해주세요"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디자이너의 손길이 꽤나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손끝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빗질을 하거나 가위질을 하는데 몸이 전부 작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종일 움직여 땀도, 먼지도 많았는데 괜히 너무 떡져 보이거나,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지도 살짝 걱정이 되었다. 기분 좋은 가위질로 머리를 다듬는 시간 동안에도 계속 고민이 이어졌다. 약속을 가야 할까? 아니 약속이 쌍방의 이야기라면 이건 제안을 받은 것이니 약속은 아닌 셈이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될까? 그 모임에 참석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잘린 머리카락은 수북한데 어째 내 마음속에 고민은 더 자라 버린 듯 어지럽다. 옷도, 머리도 벌써 모임에 참석해도 충분할 만큼 준비가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도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대학시절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낸 고시반의 모임이다. 졸업생, 재학생이 모여 그간의 소식을 전하는 그런 자리였다. 아마도 내가 예전 직장에 계속 있었다면, 아니 이직한 직장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면, 아니 그마저도 박차고 나와 차린 사업이 제대로 되어 꽤 돈을 벌었었다면, 어쩌면 그랬다면 이런 고민들을 덜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분명 내가 가야 할 이유는 고민하고 고민을 해 봐도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재학생과 졸업생들과의 만남의 자리. 대학 동문들이 현직 어디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서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자리 속에서 나는 쉽게 접점을 찾아지지 않았다. 내가 가지 않는다고 누군가 날 찾아올 일도, 서운할 일도 없는 그런 자리다.
예쁘게 머리를 손질하고 나오니 이제 노을도 뉘엿 제법 어둠에 물들었다. 조도가 낮아지고 어둠이 깔리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나의 부족함이나 내세울 것 없음도 밤이라면 조금은 적당히 감추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간 주저했던 마음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동시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상상했던 데로 주변의 공영주차장을 찾아 내비게이션을 켰고, 금요일 퇴근시간임에도 그리 막히지 않고 도착했고. 공영주차장은 심지어 빈자리도 있었다. 저 앞에 학교 정문이 보였다. 내가 20년 전 바라보았던 그 정문이 그대로 내가 알고 있던 학교가 그대로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는 그 사실에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냥 누가 왔는지 인사만 드리고 가도 되는 거야. 아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나와도 되니까. 그래보자'
스스로에게 최악의 상황까지 미리 준비를 시키고 녹색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 대학 정문으로 들어서자. 굳어있던 심장이 순간 몽클해졌다. 그 시절 그렇게 드나들던 건물은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어 주었고, 입구 앞에서 모여 있는 몇몇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일까?
"몇 학번 누구신가요? 말씀 주시면 명찰을 드릴게요"
"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아마 명단에는 없을 텐데.. 99학번"
"어이쿠 성준아!! 야 이게 얼마만이냐. 어이고 이놈아"
들어오는 입구에만 정신이 팔려 미쳐 그 옆에 서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곳에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고, 오고 싶었던,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 서 있었다. 교수님이 계셨고, 함께 공부했던 형들이 동생들이 있었다.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들어 머리색이 심하게 밝아지거나, 부족해진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그 모습이었고, 내가 그리워하던 그 목소리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14-5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입사 초기에는 주말이 없었던 그 시절엔 감히 시간을 뺄 수 없었고, 이직과 사업의 실패와 가족의 상실은 스스로를 많이도 위축시켰다.
스스로의 자존감.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사회적 자존감을 회복할 길이 없어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비슷한 출발을 했던 그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 속 역할이 바뀌고, 명함의 직함이 바뀌고, 어깨의 높낮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멈춰버린 내가 그들과 같은 방식과 기준으로 자존감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르자 나는 잠시 동굴에 몸을 감추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어느새 그들과 나는 다른 기어로 세상을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흐르는 물은 돌을 깎아내고, 장은 더 깊은 맛을 내듯 사람들도 깊이가 생겨서일까? 십몇 년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제자를, 후배를, 동료를 그리도 반겨주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내가 과연 이런 환대를, 이런 반가움을 받아도 될 사람인가 순간 의아해지기까지 했었다.
순식간에 내 편이 생긴 기분이었고, 나의 어깨는 가벼워지고 내 등 뒤는 든든해졌다.
모르고 온 이 날의 메인 뉴스는 교수님의 정년퇴직이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시게 된 교수님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간의 제자들을 모으셨는지도 모른다. 20여 년이 넘은 고시반은 이제 제법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내었다. 이천 십몇 년도 학번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음을 말할 때는 벌써 저 나이가 직장인인 된 것인지 놀라기도 했고, 처음 듣는 학과명에 새삼 세월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교수님은 습관처럼 하시는 말들이 하나 있었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인생 다 그렇다"
십 몇 년의 세월 동안 잊고 살았다. 항상 교수님의 입가에 걸려있던 말. 낙방의 아픔과 시련은 그 말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하기 쉬운 위로라 여겼고, 으레껏 하고 듣고, 넘겨가는 말이라 잊고 살았다. 나의 삶은 그동안 전혀 괜찮치 않았다. 괜찮을 리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괜찮을 리 없다고 믿었던 나는 오늘 이곳에 도달했고, 두려움보다 설렘과 반가움, 아련함으로 가득 채우고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몇 년 만의 술자리에서 그동안 얻지 못했던 위로를 마음껏 받고 채워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난 참 많이도 괜찮이 진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있을 수도 있었을 조롱과 조소를 내심 견딜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모른다. 까짓 껏 한 번 웃어주고 넘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여겼는지 모른다. 내 걱정만큼 나는 그것을 나름 극복할 수 있겠다 벌써 마음먹고 왔던 것이다.
그랬다. 괜찮아진 것이다.
교수님의 그 습관을 어떤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의 그 말씀 덕분에 안 괜찮던 그 시절도 괜찮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랬다.
교수님의 그 말은 상처받고 아픔을 겪고 있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아픔을 딛고 이겨내고, 그래서 정말 괜찮아질 우리를 보고자 하시는 본인에게, 미래의 우리에게 하시는 주문 같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아픔을 견디면 우리는 정말 괜찮아졌고.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끝까지 버티게도 되었다.
그렇게 그 말은 괜찮지 않은 날들도 괜찮게 버티고 넘어갈 수 있는 주문이 되었다.
십몇 년 만에 그들을 만나, 나는 그 말 한마디를 품고 돌아설 수 있었고, 무언가 빚을 졌기에 다음에 또 오리라는 명분을 두고 돌아섰다.
술자리는 20년전에도 있었던 그 허름한 횟집이었으며, 여전히 같은 주인이 투박하고 푸짐하게 회를 떠 내는 곳이었다. 취기였을까? 착각이었을까? 지금 모여 떠드는 그 모습 중간 중간에 우리의 과거 모습들이 오버랩되었고, 먼저 돌아 나온 내가 본 그 술자리에는 20년전 참 밝게도 웃고 떠들던 우리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