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었는데. 그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평소 연락 없는 자식을 보며 한탄하듯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만, 이 손님은 정말 소식 없는 것이 기쁜 그런 손님이다.
30대 후반에 갑자기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빙빙 돌았다. 병원에서 수액도 맞고 약도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고, 침대에 누워있지 않으면 세상은 빙그르르 돌기만 했다. 그러면서 구토가 함께 찾아왔다.
그랬다. 마치 멀미하는 것 같았다. 내 발은 땅 위에 단단히 서 있는데, 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주 심한 멀미와 어지럼증이 함께 왔다.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도 차도가 없어 대학 병원 응급실로 택시를 타고 갔고, 고작 어지러움증 만으로는 응급실 침대를 차지할 짬이 되지 못해 보호자 대기실 구석에서 비닐봉지를 손이 주고 죽은 듯이 있다 토하다를 반복하고 얻은 병명이 있다.
메니에르 증후군 - 메니에르 증후군(메니에르병)은 속귀(내이)의 내림프액이 과도하게 증가해 반복적인 회전성 어지럼증, 청력 저하, 이명(귀울림), 귀 먹먹함(이충만감) 등을 일으키는 질환.
40대에 흔하지만 모든 연령에서 발생하며, 발작 전후 증상(귀 먹먹함→어지럼)이 전형적.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주나, 생명에는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질병은 아님 <세브란스 병원 건강정보>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더니, 이 손님을 멀고 먼 타향 베트남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덕분에 나는 푸르른 녹음과 눈부실 햇살 아래서 변기를 부여잡고 웩~ 웩~ 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느낌 알까? 너무 심한 구토를 하다 보면 허리에 굉장히 큰 힘이 가해 진다는 걸.. 덕분에 허리 근육이 놀라 요통까지 곁손님으로 찾아온 것은 차마 말도 못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지병이기에 상비약을 챙겨 왔을 리가 없다. 상비약은 몇 년째 방 서랍에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었고, 해외여행에 대비해 비상의료품으로 선택되지는 못했다. 한 두시간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해봐도 그때뿐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 어지럼증에 평소 복용했던 약을 검색했지만, 전문의약품에 의사의 진단서가 필요한 약이라 타국에서 쉽게 구매하지도 못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글자를 눌러가며 인터넷을 뒤져서는 급한 대로 멀미약을 그랩으로 시켜 복용했다.
침대 위에만 있는데 멀미약이라니...
대증요법이 통했는지 빙빙 도는 시야가 조금은 나아졌지만 울렁이는 속은 아직도 나아지질 않았다. 멀미약기운일까.. 심한 구토에 기운이 빠져서일까.. 속절없이 한 잠. 낮잠에 빠졌다.
조금은 살 것 같다. 그런데 밖이 어둑어둑하다. 와이프와 아이들은 그랩으로 음식을 배달시켰다. 내 밥은 소화가 잘 되라고 죽이다. 오늘 하루 죽 쒔다.
10년 만에 찾아온 지병으로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남편과 아빠가 걱정된 가족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제대로 휴가를 즐기지도 못했다. 관광도 휴식도 모두 어정쩡 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선짜 야시장과 헬리오 야시장 중 고르고 고르다 찾아간 헬리오 야시장은 문을 닫았다. 결국 근처에 롯데마트만 돌아보다가 왔다. 한국에서도 잘 안 가는 롯데마트인데... 그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무언가 안 좋은 조짐이라는 걸.
한껏 기분을 내고 있었던 여름휴가가 갑자기 훅 떨어지는 바이킹처럼, 아니 에버랜드의 T 익스프레스처럼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칠 줄 누가 알았을까? 오랜만에 지병이 재발했고, 부작용으로 요통도 함께 얻었다. 나는 땅 위에 두발을 꼭 붙이고 있는데도 꾸준히 멀미약을 먹어야 견딜만했다. 무료 업그레이드라 하루 더 연장했던 숙소는 오롯이 침대 위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넓은 침대에서 혼자 오롯이 쉴 수 있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일이 최악의 상황일 거라 믿었고, 어서 빨리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으면 싶었다. 하지만 떠나는 비행기는 아직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고, 예약했던 마지막 숙소도 남아 있었다.
-May I help you with the check-out? How was your stay?
-Yes, it was very nice. Do we have any remaining charges to pay?
-Yes, there are charges for breakfast, room service, and the room upgrade.
-The room upgrade? On the first day, we were told it was a complimentary upgrade.
-Let me see… according to the form you signed on the first day, you agreed to the upgrade charges.
-Yes, I remember signing it. But the person who showed us the room explained that we were lucky and that the upgrade was free.
-Please give me a moment to check this for you.
분명 첫날 무료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룸은 비용이 청구되어 있었다. 처음에 보증금과 업그레이드 내용에 안내받았는다. 그리고 사인도 했다. 그리고 체크인 시간이 되어 방을 안내받으며 무료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일박을 더 추가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업그레이드 비용이 그대로 청구된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겠다는 직원을 안내를 받고 우리는 1-20분 정도를 로비에서 대기해야 했다. 우리를 안내해 준 직원이 오프인 날이라 스피커 폰으로 함께 통화까지 해야 했고, 무언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직원이 무언가 오해를 해 우리에게 잘못 안내해 준 것이었다. 통화를 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동시에 우리는 그 직원이 걱정되기도 했다.
- If the upgrade fee is required, we will of course pay it, though we were a little disappointed by the situation.
돈을 지불하겠다는 의사와 함께 매끄럽지 못한 상황에 조금의 불만을 이야기했고, 직원은 잠시 매니저와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다시 몇 분의 시간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업그레이드 비용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미 어색해진 상황들과 무언가 진상이 되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걸어 나오는 로비의 그 길이 멀게만 느껴지고, 왠지 뒤통수마저도 따끔거렸다. 달콤한 초콜릿 속에 가려진 독한 위스키가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뒷 맛이 씁쓸한 그런 위스키 초콜릿 같은 맛.
마지막 날의 속소는 다낭 공항 근처의 레지던스였다. 세탁이 가능하고 공항이 가까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곳. 우리는 여행 마지막 숙소는 세탁기가 있는 곳을 선택하곤 한다. 여행의 피로도 풀어가며 그간의 빨래들을 몽땅 세탁하고 건조해 돌아가는 짐을 싼다. 내키면 또 다른 곳으로 바로 여행을 떠나도 될 정도로. 이번 숙소도 크지 않지만 건조까지 동시에 되는 세탁기가 있었고, 부지런히도 우리의 여행 빨래들을 세탁해 주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는 리조트에서 추천받았던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에 들렀다. 몇 번 그랩으로 주문도 해보았는데 꽤나 만족스러운 퀄리티와 가격대에 한국에 오기 전에 꼭 방문하고자 했다. 인기 식당이라 대기가 길까 미리 예약까지 마치고는 새로운 숙소에 들러 세탁을 돌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식당에 들렀다. 식당은 웨이팅 장소가 별도로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고, 그 앞에는 기념품 점도 있다. 기다리는 동안 간단한 쇼핑도 가능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작은 인형도 고르고 기념품도 골랐다.
식당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 가장 비싼 식사를 주문했다. 실해 보이는 크레이피시를 두 마리 정도와 크랩, 그리고 가리비 종류도 주문했다. 조리되는 순서로 음식이 나오는데 사람이 많아서인지 약간 시간이 걸렸다.
-... 저기 우리 포장할까?
-응? 왜 그래 여보. 어디 안 좋아?
누구보다 해외여행을 좋아하고 즐기는 와이프가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한다. 아까부터 조금 초조해 보이고 피곤해 보이곤 했지만 그저 여행의 피로라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단 한 번도 먼저 숙소에 들어가자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나... 공황이 온 것 같아.
몇 년 사이에 아내는 사업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공황장애를 경험했었다. 갑자기 죽을 것 같다는 공포와 발작으로 잠깐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었고, 그래도 큰 탈 없이 잘 견뎌오고 있었다. 오랜만의 여행의 피로 때문일까? 돌이켜보면 경유 비행기를 놓쳤을 때도 아내가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했고, 호이안에서는 식당을 헤매고 내가 계단에 머리를 부딪혀 소리 낸 비명에 와이프는 혼비백산했고, 리조트에서는 메니에르가 제발해 숙소로 혼자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 소식을 모르다 한참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업그레이드 비용이 청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상황을 설명하고 조율한 것도 아내 몫이었다. 꽤나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메인 코스 두 개가 나오기 전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포장을 부탁했고, 서둘러 그랩을 불렀다.
여행 통틀어서 가장 비싼 식사를 주문하고서 우리는 메인 요리에 손도 대보지 못한 채, 식당을 나왔다. 아내는 숙소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고, 지친 아이들도 아내 곁에 누워 함께 잠에 들었다.
나는 깨어있는 아이들과 포장에 식어 풍미를 잃어버린 크레이피시 한 마리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저녁을 때웠다. 게맛살을 먹는 것 같았다. 입안이 썼다.
-여보 체온계 좀..
-체온계? 왜? 열이 나?
-나 말고 큰 애가 뜨거워..
아까부터 추워하는 아이에게 해열 진통제를 한 알 먹이고 와이프와 함께 재웠는데 큰 애 열이 심상치가 않았다.
39.1 도
아... 평소에도 39도 이상의 열을 좀처럼 경험해 보지 않았는데 베트남에서 고열이라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 뎅기열?
-아빠 나도 재볼래..
잘 놀고 있던 막내가 자기도 체온을 재 보겠단다.
38.5도.
칭얼거림 없이 잘 놀던 아이였기에 이렇게 고열이 나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우 아빠야. 해열제 있니?
장모님도???
6 가족 중에 3명에 38도 이상 열이 나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상비 해열제를 먹이고는 한 시간쯤 기다렸다. 다행히 장모님은 열이 잦아들기 시작하셨다.
39.8 38.6
아이들은 열이 내리지 않았다.
메니에르를 앓던 나는 공황장애가 온 아내와 39도 가까운 고열의 두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 국제 병원 응급실을 향했다.
귀국 D-1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