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까지는 뭐든 좋았지~
베트남의 둘째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둑해진 거리로 나서자 이제야 베트남에 왔구나. 이제야 해외여행을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수백 년 전의 골목이 살아있는 길에, 형형색색의 등불을 밝히니 한 폭의 그림이었다. 시간과 역사가 남아 있는 건물들과 골목길에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 자라온 초록한 나무들과 색색의 꽃들 그리고 그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등불들이 만나니 베트남, 아니 호이안의 밤거리는 지금껏 걸어본 어느 거리보다 더 몽환적이며, 환상적이었다.
적당히 식혀진 더위도, 배를 채우고 나온 포만감도, 강물 위를 떠 다니는 소원배와 소원등불의 흘러가는 모습도 모두가 제 한몫을 톡톡히 하는 풍경이었다.
낮에 본 그 강이 맞는지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황량했던 강과 강변의 거리가. 어둠이 찾아오자 더할 나위 없는 꽃단장을 하며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강가에는 나와 같은 눈빛을 한 수많은 여행자들이 있었고, 그들 역시 나처럼 이 풍경을 위해 먼 거리를 더운 날씨를 견뎠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호이안 올드타운의 야경은 비현실적이다. 과거의 하드웨어에 지금의 콘텐츠와 사람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단 한 순간으로 압축해 버린다면, 호이안의 밤거리 같은 풍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몇 백 년의 시간을 견딘 건물들과 거리마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다양한 컬러의 피부색과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곳에 지금의 베트남을 보여줄 수 있는 쇼핑과 문화 콘텐츠들이 호이안을 더 매력적인 도시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뭐.. 사알짝 상업화되어 가는 느낌에 조금은 껄끄러운 여운을 남기기는 한다. 그래도 올드타운의 밤거리는 꽤나 예뻤다.
물론 오늘의 호사도 마냥 수월하게 누리게 된 것은 아니다.
첫날밤을 긴 장거리 이동에 지쳐 쓰러졌지만, 시차는 우리를 베트남의 새벽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한국보다 두 시간 느린 이곳에서 우리는 평소 한국에서의 시각에 눈을 떴다. 한국 시간 6시 30분. 베트남 시간은 이제 새벽 4시 30분이다. 아직까지는 체력을 소진하지 않아서일지, 여행의 초반이어 서일지 우리는 더 더워지기 전에 베트남의 로컬 거리들을 걷고 싶었다. 그들이 보내는 아침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다행히도 근처에 채식을 위주로 아침을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다. 마침 숙소에서 걸어서 20여분 남짓 정도. 가벼운 옷차림에 나선 길은 제법 걸을 만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부지런도 했다. 겨우 6시를 넘은 시간인데도 벌써 도로에 오토바이는 제법 수가 된다. 모두 오늘을 시작하는 이들일 테다. 등골에 땀이 송송 솟아날 무렵에 우리는 리스트의 식당에 도착했고, 아내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식당 앞 메뉴판 위에 무언가 안내문이 붙었다. 호기심 반과 어제 다운 받아둔 번역기를 시험해 볼 겸 안내문을 스캔하고는 기다린다. 식당이라기에는 실내가 너무 조용해서 불안감이 생길 무렵 번역기가 지식을 뽐낸다.
"우리는 안식년에 다다랐습니다. 제사와 혼수를 위한 주문만을 받고 있습니다."
어라? 분명 구글맵에는 오픈이라고 되어있는데??
동남아 식당을 다니다 보면 구굴맵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영업 중으로 표시된 식당들도 영업 중단된 곳들이 제법 많다. 업데이트가 쫓아가지 못한다.
별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주변의 식당을 구글맵으로 찾아보았다. 걸어가기에는 다들 거리가 멀다. 타협으로 장모님과 아이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유명하다는 반미집에 들러 테이크아웃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침에도 그랩으로 호출할 수 있는 차들이 꽤 보인다. 호기롭게 그랩을 요청하고, 기사가 콜을 받았지만, 곧이어 취소 문자가 이어진다. 두세 번의 시도 끝에도 기사들이 콜을 거부하는 일이 이어지니 아무래도 아침에 그곳으로 가는 것이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별수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절반쯤 돌아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러 혹시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있는지 물었다. 순박한 베트남 청년이 아까 우리가 가던 식당 넘어 문을 연 식당이 있다고 알려준다. 더 이상 가면 되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던 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곳이다.
돌아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갔다 돌아왔다 다시 갔다.
문을 닫은 채식 식당을 지나, 베트남의 시골길을 더 걸었다. 이제 등은 땀으로 젖었다. 벌써 기온이 올라가고 햇살이 따가워짐을 느꼈다. 청년이 말한 식당은 정말 로컬 식당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아침을 해결하는 곳, 메뉴도 없고, 면을 먹을 것인지 아닌지만 결정하면 되는 곳.
우리는 그곳에서 다섯 명이 식사를 하고, 1인분을 더 테이크아웃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돈으로 7,000원쯤을 지불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고, 베트남어는 아예 알 수 없어 손짓 발짓으로 금액을 물으니 본인이 받을 금액을 금고에서 꺼내어 이만큼 달라고 한다. 캬~ 정말 로컬식당이구나. 우리나라에 시골에서도 이렇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했다는 만족감과 포만감에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게다가 한 번 걸었던 길이라 어느 정도 걸어야 할지 알기에 막연한 불안감도 없었다. 아까 그 동네 슈퍼에 들러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고, 거기서 만난 동네 꼬마들의 아침인사에 보답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6시 조금 넘어 출발한 아침식사는 숙소에 도착하니 9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벌써 소화도 다 시킨 것 같았다.
이제는 게을러진 사춘기 큰 딸에게 힘들게 공수해 온 아침을 먹이고는 호이안의 올드타운을 구경하러 나섰다. 6명이 이동하려니 그랩도 큰 차를 불러야 했다. 출근시간이 지나서일까? 관광객을 태울 그랩은 넘쳐났고, 금세 그랩이 잡히고, 올드타운에 도착했다. 어젯밤 지친 걸음에 본 올드타운은 낮에 본 그것과는 또 달랐다. 뜨거운 태양과 이국적인 건물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버려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던 호이안의 그 거리가 이제는 새롭게 관광지로 탈바꿈되어 세계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8월 5일 호이안 38도 체감온도 41도 습도 75%
리스트 중에서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이 정해졌다. 우리는 올드타운에 들어서자마자 빙수집을 목표로 행군을 시작했다. 더운 여름을 떠나 휴가를 온 이곳이 더 더웠다. 모르고 온 것은 아니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더위였다. 첫 외출로 우리를 깨달았다. 베트남은 낮에 관광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여행을 온다고 새로 산 티셔츠를 입었다. 스포츠 웨어느낌의 티셔츠에 시원한 소재라 생각했던 티셔츠를 입었는데.. 아뿔싸 땀이 배출이 되지 않는다. 내 등은 권투선수가 땀복을 입고 러닝을 뛰었던 냥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른 곳들보다 등에서 흐르는 땀이 심상치가 않았다.
-에휴 시우 아빠야 티셔츠 하나 사. 갈아 입자
장모님 부탁을 하실 정도다. 어익후..
이번에 우리는 더위에 잽을 맞았다. 이미 아이들에게는 올드타운의 거리도, 이국적인 풍경도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어컨이 나오는 빙수집을 찾아 더위를 식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 투정 부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그런 생각도 빙수집을 나서자마자 바뀌었다. 숙소로 가자! 그것만이 살길이다.
어제 미쳐 하지 못한 환전을 하고는 겨우 근처 과일 가게를 찾아 한 보따리 과일을 집어 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한 무더기의 망고와, 막바지 망고스틴, 한국에서는 무슨 맛인지 잘 모르지만, 괜히 동남아가 오면 먹고 싶어지는 용과, 그리고 정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름마저 잊어버린 그 열대과일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래도 2만 원 정도다. 그 더위 덕분에 이런 과일이 이렇게 저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또 더위가 밉지만은 않다.
숙소 부엌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달콤한 열대과일을 한 껏 베어 물고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게 휴가지... 그렇게 에어컨과 달콤한 동남아의 과일은 우리의 무더위를 잠시 잊게 만들어 주었고, 저녁 예약한 식당에서는 기대를 저버리리지 않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제 첫 더위를 적응하지 못해, 몇 백 미터를 남겨두고 에어컨의 유혹에 저버렸던 식당을 낮에 미리 예약해 두었다. 식당 이름처럼 모닝글로리가 맛이 있던 식당에서 우리는 푸짐하게도 시켜 먹었다. 어젯밤 식당에서 가려던 이곳이 더 시원하면 어떨까 하고 가족들과 농담을 나누곤 했는데. 어제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길 잘했다. 이곳은 음식은 좋았지만 꽤나 더웠으니까. 뭐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배가 든든하면 살만하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에 한껏 포만감을 느끼고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야경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가 보고 싶었던 그 베트남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