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일찍 끝난 살림에 허리를 펴고 차 한 잔을 만든다. 오랜 시간 불면증으로 고통받아온 나는 저녁이면 캐모마일 한잔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차 한잔을 들고 베란다를 내려다보는데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남녀가 눈에 띈다. 마침 눈이 내려 하얀 바닥을 비추는 불빛이 더욱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언니와 나이 터울이 많이 져 혼자 크다시피 한 나는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였다. 맞벌이하던 엄마 아빠를 대신해 낮에는 할머니에의 보살핌을 받으며 퇴근하는 엄마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는 했다. 엄마가 오는 시간이 되면 기다리지 못하고 골목 초입까지 내려가 가로등 밑을 서성거렸다. 그때쯤이면 집집마다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칼칼한 찌개와 생선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길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다. 골목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났다 자기 집 대문으로 쏙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밥 먹으라는 할머니의 부름에도 엄마와 같이 먹겠다며 뻗대기를 하기 일쑤였다.
신혼집 골목 초입에도 가로등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드문드문 서 있어 운치를 더했던 것 같다. 저녁을 지어놓고 곧 퇴근할 남편을 맞이하러 골목으로 나간다. 집을 간나와 멀리서 비추는 주황빛 불빛을 바라보면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에 맞춰 나의 눈도 커졌다 작아진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지루해지면 가로등과 집 사이를 오가며 기다림의 설렘을 만끽한다. 오가는 와중에도 가로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렘이 초조함으로 변할 때쯤 바람처럼 가로등 밑을 지나는 남편을 발견한다. 남편은 잠깐 사이 차가워진 나의 손을 꼭 쥐어 주머니에 넣고는 집으로 이끈다.
멀리 있어 잘 보이는 것이 있다. 가로등 밑에 서 있으면 따뜻한 불빛에 마음이 빼앗기지만 정작 자신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과의 거리가 그립다. 옹기종기 붙어 앉아 서로에게 불어넣던 온기와 맞잡은 손이 아쉽다.
늦게까지 켜져 있는 텅 빈 가로등은 그리움과 사람의 온기가 묻어있다. 골목의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엄마의 품, 어린 시절의 추억, 신혼 때의 달콤함, 남편의 따뜻한 손, 그리고 기다림의 초조함과 설렘이 공존한다. 창으로 보이는 가로등에서 그리움의 내음이 발한다. 창을 열고 빛 속으로 코끝을 가져다 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