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정성과 금액은 소박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피난길
“어느 날 수학여행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마을이 그냥 다 불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불타는 고향을 뒤로하고 그대로 육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거야. 그렇게 피난길이 시작되었어.”
할머니께서 이야기를 꺼낸 지 벌써 1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제법 말씀을 이어나가셨는데도 기나긴 회상 속에서 할머니는 아직 채 성인이 되지 못한 앳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이제는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가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상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명료하게 말씀하시던 기운 넘치는 노인이었는데 말이죠. 어느덧 주름과 눈두덩이는 깊어졌으며 말씨는 점점 어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모두에게 시간이 공평하게 흘러가듯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듯이..
우리는 흔히 나날이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며 세월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반대로 몸의 성장이 멈춰버린 저는 제가 조금씩 먹어가는 나이를 쉽게 체감하지 못합니다. 혼자 살다 보면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스스로 보기에도 눈에 띄는 몸에 변화가 생겨나야 변화를 자각하게 됩니다. 매일같이 보고 있어도 의식을 해서 보지 않으면 그 작은 변화를 세세히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건 가족과 같이 매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수인 공기의 존재감을 항상 인지하지 못하듯이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에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 당연히 옆에 있어주던 존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우리는 종종 무감각 해집니다. 그렇게 점점 옅어져 가는 존재를 조금씩 떠나보내게 됩니다.
그날 할머니와의 이어갔던 기나긴 대화가 저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일상의 소중한, 그러나 그날은 미처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그런 날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대화 같지만 다소 일상적이지 않은 주제. 무덤덤하게 할머니의 일대기를 길게 이어가던 바로 그 대화를 당시에는 별일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앉아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할머니와 온전하게 오랜 시간을 대화해 본 마지막 기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그때는 할머니의 기나긴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자뭇 길다고 느꼈었는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버렸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존재의 부재가 찾아와야 그 소중함을 더욱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도 그날 그것을 아셨을까요? 그날은 장손주와 한번 끝장 토론을 해보겠다는 자세로 쉬지 않고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께서 이것저것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인지 기억은 나지는 않습니다만 제법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작은 꼬마아이였던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내 삶을 즐기기 바빠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손자와의 대화 속의 어린 할머니께서는 소학교에서 기미가요를 불렀던 꼬마였으며, 너무나도 빨갱이를 싫어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레닌이니 볼셰비키니 하는 사상 교육을 지겨워하던 여고생이었습니다. 저는 중간중간 잘 모르거나 궁금한 내용들을 묻거나 감탄사 같은 추임새를 땔감 같이 넣어 보았습니다.
이야기에 속도가 붙어 어느새 6.25가 터졌고 1.4 후퇴 때 부산에 피난을 와서 소개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험난한 시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그리웠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꼬여 결혼을 승낙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겨 여자 아이 두 명과 남자아이 한 명이 더 태어나서야 할머니는 대학에 보내주겠다던 할아버지의 약속을 잊기로 하였답니다. 이제 제법 알만한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 등장할 때쯤 할머니는 갑자기 다른 맥락의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가난했던 남한, 풍족했던 북한
공산당이 싫어 전쟁통에 남한으로 피난 오셨던 할머니는 막상 내려오고서는 처음에 많이 놀랐었다고 합니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남한사람들이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이라는 데요. 당시 공업이 발달했던 북한과 달리 농업 중심이었던 남한의 경제 수준이 너무나도 낮게 느껴졌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던 근거를 몇 가지 들어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증거가 바로 생선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당시에 내륙에서도 생선을 먹을 수가 있었어. 근데 남한에서는 내륙에서 생선을 구경하기가 너무 힘든 거야. 남한 내륙 사람들은 대부분 생선을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몰랐어. 그 정도로 남한이 가난했어.”
“에이, 할머니 그건 전쟁 중이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예 먹는 방법을 잘 모르더라니까. 구경을 못해봤으니.”
그러고 나서 잠시 삼천포 생선으로 빠졌던 대화 주제는 돌아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아버지의 학창 시절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이제 다섯 살이 되던 1988년, 세상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이 많이 없었습니다.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어느 친척들도 제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선뜻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아직 어려 상처를 받을까 봐 굳이 말을 하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서는 이제는 다른 의미로 굳이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져 버렸고 저도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들려주신 할머니의 눈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일대기는 매우 신선한 내용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얘기 속의 그의 모습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나와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나도 조금은 알고 있는 이야기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이 묻어나는 관점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시간은 훌쩍 넘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최근의 일들을 모두 되짚고 나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다 서로가 지친 듯 잠시 휴식의 침묵이 다가왔습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숨을 고르듯 땅을 바라보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문득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총평하듯 말을 다시 이어갑니다.
“그래도 남한 와서 잘되고 성공한 거지. 잘 먹고 잘살았어. 친척은 없지만 잔치상 대접할 여유가 있어서 명절에는 실향민 친구들을 다 우리 집으로 초대했으니까. 우리 이북식으로 불고기도 해서 먹였고. 녹두전을 계속 붙여 대접했어. 이만하면 성공한 거지! 그때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었어. 그리고 가족들에게 생선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해줬어.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성공의 척도, 생선
그 말을 듣고 보니 어린 시절 밥상에 생선요리가 자주 올라왔습니다. 고등어조림, 갈치구이, 임연수 구이, 동태찌개 등. 임연수 구이 껍질이 너무 맛있어서 사달라고 조르다가 혼났던 기억. 어린 손으로 생선 바르기 어려워 대충 발라 먹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은 기억. 그럼 할머니가 정성스레 생선을 발라 내 수저 위에 올려주던 기억 등.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할머니와 따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집에서 생선 요리를 집에서 먹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들고 집적 살림을 하면서 생선요리가 얼마나 하기 어려운 요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하는 과정은 둘째치고 그 냄새 등의 뒷감당을 하려면 제법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하는 요리인걸 어렸을 적에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어려서는 ‘생선은 가격이 저렴한 서민음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어 집에서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으로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반대였습니다. 그 생선구이 반찬이 있던 한 끼 밥상이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척도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할머니에게는 그러한 증거였습니다.
고향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버린 타지에서 한 가족을 온전히 이루고 잘 먹이고 살고 있다는 증거 중의 하나.
할머니께서 차려주시던 정성 어린 식사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지 생선구이를 보면 어린 시절 그때의 식탁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잔뜩 차려진 생선구이 밥상을 보고 있으면 성북동 옛 동네와 살던 집과 할머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갑니다. 여전히 그때가 가장 행복한 한 끼 식사를 먹던 추억이기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 온전히 사랑으로 대접받던 그 느낌 그것이 그리운 걸까요?
요즘에도 집에서 종종 생선요리를 하곤 합니다. 주로 생선을 구워 먹는 것을 선호하는데 집에서 생선구이를 한다는 것은 꽤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생선구이 요리 자체의 과정은 심플하나 생각보다 뒤처리가 귀찮은 요리입니다. 먹을 때는 좋은데 후에 집안 전부를 수조로 만들어 버린 듯한 생선 냄새와, 생선 기름이 가득 묻어난 조리도구 뒤처리를 하고 있노라 하면 ‘아 다시는 집에서 안 해 먹어야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 과정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겠죠.
생선 그 자체를 구우면 되는 원초적인 요리 생선구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사랑을 선사하던 할머니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