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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곰 May 01. 2023

라면, 그 평범한 위대함

라면 한번 같이 안 먹어본 친구가 있을까요


“라면을 가장 인상 깊게 먹은 기억은 언제인가요?”

위 질문에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래도 잠시 생각해 보면 몇몇 장면들이 기억날지 모릅니다. 군대에서 반합에 끓여 먹었던 라면. 학창 시절 매점에 가서 친구들과 젓가락을 돌려가며 함께 먹었던 라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딱히 차려 먹기 귀찮아서 혼자 쓸쓸히 먹은 라면 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라면을 접할 기회가 너무 많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수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함께 라면을 먹었던 기억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이전 질문보다 쉽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라면을 함께 겸상해 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데요. 정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지만 저에게 가장 특별하게 함께 라면을 먹었던 추억을 꼽으라면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어른들의 키가 제 두 배 가까이 되던 시절.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버지 친구분들과 어느 섬에 놀러 갔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섬에 간 건지, 어떻게 그 섬에 도착했는지 등의 상세한 내용은 너무 어린 시절의 일이라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단 하나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날 우리가 라면을 먹었다는 겁니다. 방파제 같은 곳에서 부르스타를 켜고 한솥 가득 라면을 끓여서 다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땅히 자리를 잡고 먹는 것도 아니었어서 다 같이 그냥 서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키가 큰 아버지께서 제가 맛있게 라면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서계시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든든한 기둥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날의 라면이 유독 맛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열심히 붙잡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와의 식사 장면이 바로 그 섬에서 먹었던 라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 너무도 어린 5살이 되던 해에 하늘로 소천하신 아버지입니다. 지금의 제가 기억하는 이 추억은 5살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너무나도 어릴 적의 일이라 기억의 디테일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분명 돌아가시기 이전에도 집에서 매일 함께 밥을 먹었을 텐데.. 수저를 함께 들던 다른 기억들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날의 라면 맛이 대단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섬에 놀러 갔던 몇 안 되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소중해서였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라면을 먹었다는 겁니다.


효율성 최고, 가성비 최고, 맛도 최고

라면만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음식은 없습니다. 내 인생 거의 평생을 먹어왔고, 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하고는 모두 함께 라면을 즐긴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많은 라면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라면이 가성비가 훌륭한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천 원 남짓한 소액의 돈과 물 끓는 시간까지 생각하여 10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만드는 모든 제품 중에서 단돈 천 원으로 이런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물건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라면의 가성비는 거의 독보적인 경지입니다.


그 맛 또한 기가 막힙니다. 최근 라면을 가까이할 기회가 줄어 자주 접하지 못하지만, 문득 생각이 나 라면을 끓여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 ‘역시 라면 만한 음식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특히 추운 겨울날, 물놀이 이후에 바닷가에 앉아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다음날 해장으로 먹으면 그 맛은 배가 됩니다.


정말로 이 맛에 라면을 먹습니다.


맞습니다. 몸에는 해로울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라면을 기피하는 시선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MSG가 많이 들어가기에 몸에 안 좋다 하고, 저녁에 먹으면 얼굴이 너무 붓는다 하고, 더 많이 먹으면 제 몸도 붓고 살이 찐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엄마가 라면을 자주 못 먹게 했고, 지금은 와이프가 라면을 먹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둘이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가 라면 코너에 다다르면 와이프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제가 혹시 모르니 라면을 좀 사놓자 핑계를 대면 - 갑자기 집에 음식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손님이 놀러 와서 술 먹다가 찾을 수도 있다 등  가서 가장 먹고 싶은 라면으로 낱개 2개를 집어오라고 합니다. 요즘 대형 마트에서 누가 라면을 낱개로 고르냐며 항의를 해봐도 ‘우리 집에는 라면이 필요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입니다.


그런 와이프도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라면을 이겨낼 재량이 없습니다. 술에 취하면 라면 하나 끓여 오라는 와이프.

그럼 마지못해 하며 ‘인간적으로 하나만 끓여 나누어 먹자?’라고 물어보며 그녀의 죄책감도 조금 줄여 봅니다. 그럼 흔쾌히 응하며 둘이서 라면 한 그릇을 맛나게 비웁니다.


요즘 라면을 대표하는 기억은 와이프와 술에 취해 먹는 그 한 그릇의 라면입니다. 앞으로도 가끔은 라면 한 그릇의 기쁨을 함께 즐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술도 오르고 늦은 시각 먹은 라면으로 한층 더 배도 오른 저녁. 자기 전에 와이프에게 말을 건네 봅니다.

오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행복했으니 그거면 됐다고. 얼른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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