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손이 가지만 너무나도 맛있는 깍두기 볶음밥
어린 시절 우리에게는 깍두기 문화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아이들이 즐겨하던 놀이들은 주로 숨박꼭질, 술래잡기 등이었습니다. 그 놀이들은 대부분 벌칙 수행자인 술레가 존재하는 게임입니다. 술레들은 벌칙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일반 참가자들을 잡아내야지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러면 잡힌 다른 일반인이 술레가 되어 게임을 이어나가는 형태입니다.
뛰고, 손을 뻗고, 잡아채고. 술레가 일반 참가자들을 잡아내기 위해서도, 일반 참가자들이 술레에게 도망가기 위해서도, 게임을 잘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능력이 높을수록 유리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성장이 덜 이루어진 나이가 더 어린 친구들이나 유독 몸이 약했던 친구들이 계속 술레를 하는 경우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술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벌칙만 담당하게 되면 결국은 쉽게 지치고 맙니다. 게다가 함께 하는 친구들의 텐션도 같이 떨어지기 마련이고요.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깍두기를 두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같이 게임을 즐기고 싶지만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아이를 깍두기로 지정하면 술레에게 걸려도 술레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임 전체의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깍두기 문화는 아이들 사회 속 약자에 대한 배려를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품고 있는 조직에 대한 배려도 함께 품고 있습니다.
편을 나누어서 경쟁하는 게임의 경우에 깍두기 문화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팀을 나눌 때는 우선 리더를 정합니다. 보통 가장 게임을 잘하고 덩치가 큰 친구들이 리더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위바위보를 통해 팀원들을 한 명씩 리쿠르팅 합니다. 그럼 마지막에 남는 한두 명의 아이들은 보통 게임에 능숙하지 못한 친구들입니다. 게임에 능숙하지 못한 멤버를 팀에 두는 것을 꺼려야 할지, 그래도 한 명의 인력이 충원되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
그럴 때 마지막 멤버를 깍두기로 지정하였습니다. 깍두기의 실수는 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여 팀에 부담을 최소화하여 주었습니다.
깍두기는 어떻게 보면 무적의 치트키이기도 했습니다. 술레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과감한 시도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게임의 흐름의 변수도 깍두기가 있던 놀이 문화에서만 즐길 수 있던 하나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제 동생은 몸이 왜소하고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주로 리더 역할을 담당했던 저는 마지막 남은 한 명을 고를 때 동생을 마주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내 동생이 게임을 못하는 깍두기라는 게 싫어서 일부러 뽑지 않은 적도 있고 반대로 남들이 내 동생을 억지로 데려가는 느낌이 싫어 억지로 팀에 뽑은 적도 있습니다.
그 깍두기 동생이 세월에 충분히 익은 걸까요. 어느새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되더니 이제는 같이 아저씨가 되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제 깍두기 문화가 필요 없어진 동생이 깍두기란 존재가 없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름과 성숙함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내는 음식 깍두기
모두가 알고 있듯이 깍두기는 대표적인 김치중 하나입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 반찬 중 하나입니다. 놀이에서 깍두기라고 불렀던 유래도, 항상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오는 깍두기와 닮아서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깍두기는 다른 김치와 마찬가지로 발효음식입니다. 시간이 지나 음식이 익어가는 시점에 따라 맛이 변화는 데, 각 시기 별로 변화하는 맛이 독특합니다.
특히 찌개를 끓이거나 볶음밥 등을 만들 때에는 오래된 깍두기로 해야 제맛이 납니다. 담근 지 얼마 안 된 겉절이나 적당히 익어 한참 물이 오른 깍두기의 아삭함으로는 오히려 그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한창나이의 3040 김치가 이제 지긋이 떠날 날을 바라보는 황혼 노인 깍두기의 감칠맛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힘이 빠진 듯 이제는 물러졌지만 특유의 향은 오히려 강하게 살아나 이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음식이 됩니다. 한 껏 성숙해야지만 제대로 된 말을 낼 수 있다는 점이 멋있는 음식입니다.
깍두기 볶음밥은 입맛이 없을 때 이따금 집에서 와이프와 먹는 별미와 같은 음식입니다. 오랜 시간 우리 밥상을 위해 노력해 주었지만 이제는 쉬어 버려 은퇴한 깍두기를 보내주는 방식입니다.
깍두기를 잘게 손질하고 고기를 볶고, 다른 재료들을 넣어 끓이고, 다시 밥을 넣고 볶고, 뜸을 들이고. 깍두기 볶음밥은 제대로 만들려면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갑니다.
마지막 힘을 내어 화려한 음식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깍두기 볶음밥을 요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