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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Dec 29. 2021

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5화

당신은 이 모든 퀘스트를 통과하셔야 합니다.


순전히 현빈이 너무 멋져서 순식간에 빠져들었던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참 좋아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왔던 스페인 그라나다  이국적 풍경이 괜히 아련하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데다 퀘스트를  완수해가는 현빈의 모습이 한도초과의 멋드러짐을 발산했기 때문이.

실제처럼 실감 나게 등장하는 게임 속 악당들을 해치우느라 현빈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그냥 감탄만 나오게 싸워댔지.

다시봐도 미소를 불러일으키는구나


극의 후반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췌하고 가진 모든 것을 잃어가 인생을 망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절름발이에  지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자기 생명도 담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뭐 제대로 해결이 되는게 없어!


난데없이 웬 드라마, 현빈 얘기냐고?

현빈 신세가 내 신세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입덧이 문제가 아니라 출산까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다. 해결해야 할 것이 천지였다.




퀘스트 1: 기형아 검사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기형아 검사. 보통 11주 이후에 산모의 피검사를 통해 다운증후군, 애드워드 증후군, 신경관 결손 이 세 가지의 기형을 체크한다.


양가 집안에 그런 질병을 가진 사람이 없었고 두 아이들 모두 기형아 검사에서 문제가 있던 적이 없기에 피를 뽑는 순간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기형아가 나온다고 해도 우리 부부는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답만 가졌었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검사를 받고 며칠 후 일을 하고 있는데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왔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가 있어 아무래도 내원하셔서 원장님과 상담을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급적 빨리 병원으로 오시겠어요?"


빠빠빠빠암 빠빠빠빠암. (베토벤의 그 음악 맞습니다.)


'문제가 있어'라는 말에 나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아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차라리 간호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인지 더 귀띔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는 패닉에 빠져버렸다.


지금껏 애둘키우고 직장에서 이 꼴 저 꼴 다 봐온 나이기에 웬만한 일엔 별로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뱃속의 아기일에는 달랐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그랬을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남편과 통화하니 그 역시도 놀란 상태로 몇 초간 대답을 못했다. 그는 본 투 비 침착 맨이라 좀처럼 요동하는 법이 없는데 십 년 넘게 살면서 당황하는 그의 모습조차 나도 처음 보았다. 걱정만 하느니 차라리 소견을 듣는 것이 낫겠다 싶어 둘 다 바로 조퇴를 하고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병원까지 운전해서 가는 40여분 동안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내가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무섭고 걱정되었다.

'아기가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그래도 낳아야지. 정말 장애가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두려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주유소에서 준 휴지가 먼지를 폴폴 날리며 내 얼굴을 오갔고 난 이따금씩 코를 풀어댔다. 한가로운 오후의 도로 사정이 내게는 퍽이나 도움이 되었다. 그나마 울어도 되는 상황을 제공해주었으니까.


병원에 도착하니 먼저 와있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고, 항상 밀리던 병원이  그날따라 한산해 우리는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인자한 성품과 인상적인 헤어스타일 때문에 예수님 같은 의사 선생님으로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난 그분을 보자마자 다시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어서와 이상소견은 처음이지?

예수님 아니 예수님을 닮은 의사 선생님이 검사결과지를 보며 설명해주시는 것을 들으니 우리 부부는 놀란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고 걱정은 사라져 갔다.


나의 경우 다운증후군 영역이 고위험군으로 나왔던 것인데 그 수치가 말하는 의미는 다운증후군이 태어날 위험도에 대한 확률일 뿐이라고 했다. 확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거다.

35세 이후의 산모들은 기본적으로 그 확률이 높게 계산된다고 했다. 실제로 임상에서 다운증후군이 태어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데다 두 아이 역시 건강했기에 셋째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정확한 이상 유무를 알고자 할 경우 2차 검사를  실시할 수 있다며 혈액검사인 니프티 검사와 양수를 직접 빼는 양수검사를 설명해주셨다.


설명을 듣고 나와 남편은 2차 검사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가 정상이든 장애를 가졌든 낳고 키울 것이었기에 구태여 검사를 추가적으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모르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찝찝한 구석을 만들었지만 설령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해도 뱃속에서 만큼은 엄마인 나의 인식에서라도 자유롭게 해 주고픈 마음도 컸다. 그 길지 않은 시간만이라도 모든 장애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나의 불안감을 볼모로 하더라도.


그렇게 퀘스트 1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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