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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Nov 07. 2023

더 나아지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최선의 삶(임솔아)

제멋대로인 동시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터라 나의 사춘기는 극으로 치닫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살 수 있는 단지가 따로 조성되어 있었다.

'13단지 친구랑은 놀지 마, '

'13단지 근처는 가지 마'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다들 그 금기를 깨지 않으려 했다.

우리한테 피해야 할 학생은 낙인찍힌 불량학생보다도 그곳에 거주하는 학생들이었다.

맥주색이 진하게 먹여진 머리를 한 친구는 수줍음이 많았다.

학교에서는 경고등이 붙어있는 불량학생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같은 반 친구일 뿐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 집에 놀러 가게 됐다.

13단지인 줄 알았다면 아마도 여러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몰랐기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좁아터지고 시끄러운 엘리베이터는 과연 몇 명쯤 탈 수 있을까. 우리 둘이 탔는데도 비좁은 느낌이라 답답했다.

긴 복도를 지나고 여러 개의 낡은 현관문을 지나갔다.

친구는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녹이 슨 문에 손을 가져갔다.

현관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신발장 앞으로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는 내부가 적나라게 드러났다.

단숨에 전체가 보이는 곳이었다.

오래되고 삭은 냄새가 군데군데서 퍼져 나왔다.

조화롭지 못한 냄새들이 한데 섞여 더 가난한 냄새를 풍겼다.

친구는 구석 한 켠으로 나를 데려갔고, 우리는 거기가 닫힌 방인양 있었다.

대체로 실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연예인 이야기도 하고 친구들 얘기도 했다. 집중할 수 없어 기억이 나지 않는 얘기들이 전부였다.

코딱지만 한 집, 해가 지지도 않은 시간에 친구의 아빠는 누워 계셨고, 엄마도 하릴없이 계셨다.

친구보다 더 노란 머리를 한 오빠도 있었는데 싸구려 스프레이를 연신 뿌려대서 역하다고 느껴졌다.

이 눅눅하고 질퍽한 진흙 같은 공기가 나한테 들러붙을까 봐 싫었다.

13단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정말 맞다고 계속 생각했다.

정처 없이 오래된 잡지를 훑어보다가 친구는 대뜸 공부 이야기를 꺼냈고 네가 도와줄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나는 가능하다고 했다.

공부는 도와줄 테지만 대신 너희 집은 다시는 놀러 가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여기저기 찢겨져 있던 잡지처럼 내가 누추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집이 외부처럼 느껴져서 온종일 밖을 서성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로 그 친구한테서 평소에 나지 않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지워지지 않는 그 집의 냄새가 친구가 올 때마다 훅하고 밀려와 멀미가 났다.

그녀가 늘 바르던 젤 냄새와 묘하게 뒤섞여서 역한 냄새를 풍겼다.

아무튼 그날을 계기로 친구의 공부를 도왔다.

사실 내가 딱히 한 건 없었다. 그냥 해야 할 것들을 정해주고, 다된 것들을 확인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혼자 해도 되는 것이었는데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꽤 열심히 나의 진도를 따라줬고 공부가 재밌는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달라진 태도에 몇몇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았고, 성적이 많이 올라가야 받을 수 있는 노력상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의 호명에 불려 나가 상장을 받고 들어올 때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잠시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녀는 소히 일진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애초에 자신도 거기서 나올 의향이 없다고 했지만 일단 들어가면 자의로 나오기가 힘들다고 말해 주었다.

-선배도 후배도 다 좋은 사람들이야.

시시때때로 학교끼리 하는 싸움에 불려 나갔고 선배들이 부른다면 수업이 끝나지 않은 와중에도 나갔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은 여기저기 멍이 들어왔다.

-잘 싸워?

-나 싸움 잘해. 내가 힘이 진짜 세. 내 주먹에 맞으면 아프대.

나보다 왜소한 그녀가 대체 어떻게 싸움을 잘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어느 날은 선배가 오토바이를 타다 입원했다면서도 나가고 또 어느 날은 선배 생일이라서 나갔다.

진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물으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무조건 빠질 수 없는거야..

대체 왜 안 나갈 수 없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녀한테 그것은 우리가 13단지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금기사항이었을까.

학교를 나오지 않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선생님께서 누가 OOO집에 가서 더 이상 빠지면 안 된다고 알려주라고 했다.

결석일이 며칠 이상이면 자동으로 자퇴 처리가 된다는 교칙이 있었는데 거기에 해당된다고 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사실 귀찮은 일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아 내심 좋기도 했다.

그녀는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녀가 평소 해주던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그녀의 일상을 차지하는 날이었다.

길거리에서 사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이미 그녀한테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계단에 숨어들어 밤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스릴 있는지, 친구한테서 뺏은 돈으로 담배를 사면 어떤 맛인지, 실수해서 선배한테 맞을 때는 또 어떤 엿같은 기분인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며 마시는 술이 얼마나 안 취하는지, 학생한테도 술을 파는 술집이 어디에 제일 많은지, 그 집에서 술을 죽어라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렇게 위태롭고 불안한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집보다는 밖이 좋다고 했다.

길에서 살면 안심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안심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아 내가 물었더니 그녀는 정확하게 대답해 주었고 덧붙여 선선하게 말했다.

-너도 봤잖아…

도저히 항변할 수 없는 냄새가 가득한 집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녀도 집이 외부고 길을 내부처럼 느낀다는 말이기도 했다.

몰아세우듯 밖으로 내쳐지는 집을 아냐고 물었다.

한없이 여기저기 뜯기는 집을 나도 모르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녀가 그때 어떤 표정이었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저 다 큰 어른처럼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아람은 집이 싫어서 나는 밖이 좋아서 우리는 함께 집을 나갔다.

집에서 받은 상처를 길에 조금씩 버리듯…

아람은 집보다도 길에서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집에서 받은 상처 따위는 어린아이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받은 상처를 시시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최선의 삶 중)



나는 그때의 그녀를 강이를 통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강이 처럼 칼이 아닌 식칼을 꺼내 보았다.

칼보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실제처럼 느껴졌다.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들고나가 보고자 했다.

하지만 식칼은 그 존재만으로 서늘해져서 도저히 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빠지기 위해서는 더 나빠질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십 대 소녀의 가방에 들려진 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니 가슴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비록 강이의 식칼은 길을 잃었지만 저마다의 식칼은 뭉툭해지길 잠잠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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