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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Nov 14. 2023

아무거나. 는 마음의 소리를 잃었다는 대답에 불과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자신을 숨기는 것에 도가 트면 애어른이 된다.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기특한 아이가 된다.

아무거나 괜찮다고 이야기하면 착한 아이가 된다.

어린데 말이 적으면  어느새 속이 깊은 아이가 되어 있게 된다.


말을 안으로 삼키듯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먼저 찾는 습관이 든 아이들이다.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직사각형 모양의 노란 피아노 가방을 아꼈다.

피아노책 두세 권을 넣고 흔들흔들 휘두르며 학원을 가는 길이 즐거웠다.

개인룸으로 각자 들어가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제법 큰 학원이었다.

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처음부터 좋았고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늘 아쉬웠다.

그래서 천천히 건반을 누르고 한 음 한음씩 듣기를 자주 했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연습량을 다 해놓고도 아직 못했다고 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나와서 나머지 연습하자.


개인룸에서 나와 입구 쪽에 있는 큰 연주용 피아노에서 연습하라는 소리였다.

큰 피아노는 소리부터 달랐다.

청량하고 맑은 소리가 피아노 학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다른 공간에 홀로 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피아노 학원에 있는 수많은 피아노 중에서 이보다 이쁜 소리를 내는 피아노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루한 실력도 유려한 연주처럼 들리게 해주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피아노였다.

머릿속이 음악만으로 꽉 차게 해 주었다.

그러고 나면 가슴속이 간질간질 이상한데 좋았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거기서 연습하는 건 행운처럼 느껴졌다.


전국대회에 나갔다.

은상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주말에 서울에서 시상식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

꼭 참석하고 싶었다.

어느 부분에 여리게 연주하고 어떤 부분에 강하게 해야 하는지 점점 더 여리게 해야 하는 곳은 어딘지 클라이맥스로 가면 어떻게 쳐야 하는지…

미묘한 차이들에 대해 생각하며 지낸 시간들이었다.

여리기와 세기의 정도를 쪼개서 생각해 보았더랬다.

촘촘히 서로 다른 여림의 강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며 즐거워했다.

사이사이 다른 강도의 세기들이 있는 게 재밌었다.

악보마다 호흡법이 다 다르고 느낌도 달랐다.

그것들을 헤아리고 알아내는 과정이 흥미로웠지만 결코 쉬웠다고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시끄러울까 봐 피아노를 칠 수 없을 때는 허공에 연주했다.

피아노 건반쯤은 어디에나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렇게 연습하는 시간을 꾸준히 늘려 갔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포인트 하나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곱씹었다.

연주 전날까지도 악보를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 내고 수십 번을 연주했다.

그렇게 받아낸 결실이었다.

대단히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분명 노력의 시간만큼은 인정받고 싶었다.

꼭 상을 받으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선생님께서도 같이 가자고 하셨다고 전했다.

은상도 작은 상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시상식장에 가지 못했다.

그날, 주말. 그저 식구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 있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비디오영화를 보았지만 전혀 재밌지 않았다.

밖에 놀러 나갔지만 자꾸만 서글퍼졌다.

하루종일 왜 서울에 가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잔혹한 주말이었다.

선생님께 트로피를 전해 받았다.

-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잘했어 축하해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트로피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캄캄했다.

그간의 노력을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기분으로 종일 엉망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그 일은 너무 큰 일이었다.

말은 할수록 무색해졌고 하고 싶은 건 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로 넘쳐났다.

어떤 것을 너무 열심히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돼도 아무거나 해도 다 상관없다고….


마음의 소리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생각나? 너네 삼촌이 항상 물어봤었잖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하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소리야 뭐 하고 싶어? 네가 아무거나,라고 답하면…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꼭 감았다.

-아무거나는 답이 아니야. 그랬지

소리가 끊어진 문장을 이어서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파종 중)




소리가 자신의 소리를 잃어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아 함께 지쳤다.

어느새 침묵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 과정을 모르지 않았다.

들리지만 못 듣는 척, 그러다 보면 거기에 익숙해지는 걸 알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문득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피아노 소리가 그리워졌다.

피아노 소리를 한음한음 듣듯 마음의 소리도 놓치지 않았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더 늦지 않게 그 소리를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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