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년 만에 처음으로 명절을 쨌다


지역에 그래도 이름난 의사에게 예약을 했다. 지인들이 알아봐 준 정보와 며칠 동안 폭풍검색을 해서 얻은 정보를 종합해 내린 결정이었다. 암진단을 받았다고 하니 그래도 예약이 수월하게 잡혔다. 나름 명의라고 입소문이 나서 초진 잡기가 어려운 분이라 했다. 차트며 시디에 암세포 블록까지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새로운 의사에게 진료를 보았다.


새로운 병원, 처음 만나는 의사. 다시 시작이었다. 그동안의 일을 설명하자 곧바로 수술일정을 잡아주셨다. 첫 번째 수술이 12월 말이었고 새로운 의사를 찾아갔던 때가 1월이었고 수술은 2월 초로 잡혔다. 이 정도면 꽤 빨리 수술일정이 잡힌 편이었다.




2월 수술을 앞둔 그해는 1월 말에 설연휴가 있었다.

수술준비와 치료로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그때 남편이 말했다.

“여보. 우리 설에 여행 가자. 가까운데 제주도라도.”

“응? 시댁은?”

“못 간다고 하면 되지.”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결혼 20년 만에 거의 처음이었다. 가부장적이라 생각했던 남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명절을 째기로 했다.

정말로 남편은 제주도 비행기를 알아보고 지인에게 부탁해 숙소를 빌렸다. 우리 부부는 대학생이 되는 첫째와 고3이 되는 둘째를 집에 남겨두고 소박하게 여행길에 올랐다.



제주여행은 한없이 여유롭고 한가로웠다. 바쁠 것도 없고 꼭 구경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가보고 싶은 곳 몇 군데를 보고 맛있는 곳 찾아 먹고 그리고 쉬었다. 전복김밥을 사서 나오던 길에 뜻하지 않게 해안길을 만났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 충동적으로 차를 멈추고 바닷가에서 김밥을 먹었다. 아침 햇살이 파도에 반짝이며 부서지던 풍경처럼 이번 여행은 계획하지 않은 기쁨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좋았던 순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우리가 제주를 떠나는 날부터 제주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그날 새벽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시큰했다. 눈바람이 사선으로 몰아치고 길바닥에서 싸락눈이 동글동글 굴러다녔다. 길가에는 하얀 눈들이 이제 막 쌓이기 시작했다. 어둡고 캄캄한 새벽 공기와 하얀 눈이 대비를 이루었다. 왠지 나가보고 싶었다. 남편과 함께 새벽길을 걸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분리수거장까지 갔다 오는 핑계였지만 그냥 눈 내리는 새벽길을 걷고 싶었다. 차가운 바람과 뽀드득하는 느낌, 노란 가로등 불빛, 둘이서 손을 잡고 엉금엉금 걸었던 그 눈 내리는 겨울 새벽은 시리도록 아름답게 기억되었다.


누군가에게 많은 눈은 불편하고 귀찮고 재앙이지만 누군가에겐 선물이고 구경거리일 수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눈이 귀해서 오랫동안 눈구경을 못했다. 제주에 가서 한라산 1100 고지에서 눈꽃도 보고 식당 통유리창 앞 눈바람을 보면서 갈치정식도 먹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도로에 비상등을 켜고 엉금엉금 기어 다닌 기억은 새롭고도 소중한 여행의 추억이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감탄하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이번 여행에서 느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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