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바위 앞에 양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을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지 이야기를 들으려는 이유다. 양들은 크게 늑대파와 개파로 나뉘었다. 늑대를 지지하는 양들은 개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란 추측이고, 개 파는 늑대들이 양을 죽여서 먹으려 했다는 추측이다.
오랜만에 바스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코 뒤에는 마떼오가 따르고 있다. 개를 지지하는 양들은 "반가워요 바스코! 존경합니다!" 외치기 시작했다. 바스코는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고개를 숙여 양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함성과 웅성거림은 이반이 라훌을 대동하고 나타나면서 잦아들었다. 이번에 늑대를 지지하는 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수호 자시여! 진실함을 밝혀주소서!"라며 이반에게 환호했다. 이반은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바위 앞에는 양들을 대표해서 막시밀리안과 나시르, 니콜라이가 자리를 잡았다.
나시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슬프고도 비참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수호자 이반님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이반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양들을 쳐다보고서는
"모든 일은 원칙에 따라 조사할 것이다. 원칙을 어긴 자를 찾아내면 그가 늑대든, 개든, 양이든 마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다른 양을 죽일 수는 없다. 이번 일의 조사는 누구보다 고결하며,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바람의 송곳니들이 맡을 것이다." 이반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나시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양들의 죽음을 조사하는데 공정함을 위해 양이 함께 하는 것은 어떨까요?"
"양 중에 피 냄새를 아는 자가 있나? 바람의 송곳니들은 항상 피를 두르고 살아왔다. 바람의 송곳니들만큼 죽음을 잘 알 수 있는 자들은 없다. 조사는 늑대의 몫이다"
양의 죽음이기에 양들이 조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기대했던 양무리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개들을 싫어하고 힘 있는 집단을 갈구했던 양 무리들은 이반의 결정에 환호했다.
나시르는 다시 손을 들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반님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개들 역시 우리 양들을 위해 노력했고 양들의 언덕을 잘 알고 있으니 같이 조사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양들의 시선이 바스코에게 향했다. 바스코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렸다. 개들은 참여할 수 없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양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곧 양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바스코! 뭐 하는 겁니까? 당신은 양들을 책임졌던 것 아닙니까?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죠?"
"바스코! 말을 해봐요! 겁먹은 겁니까?"
"바스코! 지금 책임을 회피하는 겁니까?"
양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내용은 과격해졌다. 개들도 송곳니와 발톱과 힘을 가졌지만 바스코를 비롯한 개들은 양을 물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이 있기에 양들은 손쉽게 선을 넘었다.
"개들이 양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왜 침묵하는 거지?"
"북쪽의 이리들과 같이 이 양마을을 뺏으려는 거 아니야?"
"개들이 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늑대에게 침묵했던 양들은 개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말에서 행동으로. 점점 양 무리가 바스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늑대들은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늑대들은 이반 주위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나시르는 어느새 자리를 떴고, 막시밀리안은 양들 무리 뒤에 있었지만 양들을 말리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보리스도 슬쩍 자리를 비켰다.
니콜라이만 홀로 격분해서 양들에게 소리쳤지만 군중들의 목소리에 묻혔다. 새들은 위에서 니콜라이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니콜라이의 곁에 내려앉지 않았다. 오로지 양들이 떠드는 이야기만 자극적인 단어로 포장해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다.
라훌은 이 모습을 그저 말없이 쳐다보는 중이다. 마떼오는 바스코를 지키기 위해 털을 바짝 세우고 근처의 양들을 노려보고 있다. 그나마, 마떼오 덕분에 앞줄의 양들은 이성을 찾았다. 늑대의 피가 흐르는 마떼오는 다른 개들과 달리 늑대처럼 양을 물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죽기 싫어 광분하는 양무리로부터 바스코를 지킨 것은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양들의 본능이다.
라훌은 조용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슈잉이 빠르게 날아와 라훌에게 묻는다.
"라훌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을 뿐..."
슈잉은 빠르게 날아가며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늑대는 이번 사태를 주목하고 있다!"라고 전달하기 시작했다.
라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나시르가 이미 와 있었다.
"이 혼란을 어찌하실 겁니까? 라훌 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양들에게 다른 양의 죽음은 잊히고, 자신의 죽음만 남았습니다.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풀지 못하니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고, 바스코가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철저한 조사는 담보할 수 있는 것이죠? 진실이 밝혀지면 양들도 이성을 찾을 겁니다"
"이성이요? 공포에 빠지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본능만 남았습니다. 생존에 대한 본능이죠. 본능을 이성이 이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을까라는 본능의 물음이 해소되고 나면 그때 이성이 돌아오게 됩니다. 어떻게든 본능을 해소시키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소시킨다는 겁니까?"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남이 대신 죽어야 끝날 겁니다"
"누군가 또 죽는다고요?"
"아니요. 누군가를 죽일 겁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죽일 거예요. 피가 흐르는 생명들의 본능이죠"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보다 중요한 건 살아있다는 거예요"
나시르는 라훌의 집을 힘없이 떠나왔다. 라훌은 조용히 이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추측을 해본다. 라훌의 코에는 피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