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을 즐기는 돌멩이가 좋아할 만한 기사가 나왔다. 길들여지는 것은 순간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길들여지는 것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면서 단어를 만들어 내고, 그 단어들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 돌멩이와 수제비 비슷한 또래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다는 의미가 담긴 단어는 '어린 왕자'의 책이다. 어린 왕자에게 전하는 여우의 고백.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기대한 길들여지기는 나쁜 뜻이 아니다. 김춘수의 '꽃'에 등장하는 불러주기 다음인 좋은 관계다. 누가 불러주기 전까지는 흔하디 흔한 꽃이었지만 누가 불러주자 꽃은 의미를 갖는다. 그 꽃을 길들이면 여우의 바람이 된다. 평론가들이나 비평가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수제비는 생각했다. 시험에 나오는 내용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수제비는 어른이다. 수제비가 생각하는 어른은 나이로 정해지지 않는다. 정신연령이라고 부르는 쪽에 가깝다. 정신연령은 모호하다. 수제비의 기준은 얼마나 현실을 바라볼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들의 색은 회색이다. 어떤 것도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고 어떤 것도 명확하게 잘라지지 않는다. 흰색으로도 검은색으로도 언제든 바뀌는 회색이 어른의 색이다. 그리고 회색은 현실의 색이다. 수제비에게 어른은 회색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의 낭만적인 길들여짐은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현실의 옷을 입는다. 범죄자에게 길들여져 무기력해지는 사람의 모습. 이 단어로 여우와 어린 왕자를 보면 가학과 피학이 뒤섞여 있는 현실이 고개를 내민다. 가스 라이팅이 공격적이라면, 그루밍은 수비적인 길들여짐이다. 그 사람을 배려하듯이 도와주듯이 서서히 길들인다. 그 사람이나 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길들이는 사람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길들인다.
수제비의 회색은 또 다른 면을 본다. 길들여지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관에서 팔걸이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서로 합의한다. 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말로 협의하지도 않지만 몸으로 안다. 익숙해지는 것은 나와 상대방이 좋아 죽는 것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 서로가 편안해지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회색이다. 흰색이라고 우기면 검은색이고, 검은색이라 우기면 흰색이지만 누구도 흰색이나 검은색을 강요하지 않는다. 수제비와 돌멩이의 삶은 회색이다. 둘은 충분히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길들이고 있다.
돌멩이가 좋아할 만한 기사를 이제 봐야 할 시간이다. 돌멩이와 수제비의 이야기는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다. 비평글도 아니고 헛소리 같은 글도 아니다. 회색 글이다.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이기도 하고 비평글이기도 하고 헛소리이기도 하다. 많이 읽히기를 원하지 않지만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글이다.
돌멩이는 이 안에서 '이지적'과 '고지식'에 꽂힐게 분명하다. 이지적이라는 단어를 듣고 'easy적'이라고 해석해서 자기를 쉽게 보냐며 발끈했다는 이야기. 고지식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高=High) 지식(=knowledge)라고 해석을 해서 뿌듯해했다는 이야기.
돌멩이는 이 단어를 들고 와서는 말장난을 시작하겠지만 수제비는 회색 감이 들었다. 어쩜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무식하냐고 발끈하고, 이런 교육시스템을 만든 정권을 비판하고,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국어 기본기가 탄탄해야 한다는 기사의 색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다. 반대로 고등학생들의 창의력에 놀라고, 틀에 박힌 교육시스템을 개선한 정부를 다시 보고, 영어와 국어의 공존이 시작되었다는 시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수제비에게 이런 기사는 그냥 현실의 한 순간, 한 장소를 그대로 찍은 사진과 같다. 현실로 있다니 있다고 볼 뿐이다. 그 순간과 장소를 잡아 늘려서 요즘 시대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메타 유니버스처럼 이런 세상도 저런 세상도 모든 세상에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수제비의 우주도 역시 회색이다.
돌멩이는 역시나 카톡으로 이 기사를 보내왔다. 돌멩이의 카톡 창에서 수제비의 1은 사라지지 않는다. 둘은 길들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