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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Jun 09. 2022

그해 여름은

수업이 끝나고 자연과학대학을 내려오는 계단 앞에서 생화학과 친구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같은 과 신입생으로 들어온 훤칠하고 잘생긴 어떤 녀석이 혹시 아는 사이라면 소개팅해달라고 부탁했단다. 입학 이후 줄곧 그녀를 지켜봤다고 했다.


(학력고사 끝나고 발표가 나자마자 언니를 따라 김 실장님을 찾아갔다. 머리는 이대 앞 준오 미장원이 최고라고 했다. 19년 동안 지켜왔던 생머리에 드디어 파마를 넣는 날이다.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는 김희선 사자머리가 분명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줄 거라 굳게 믿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그녀의 수업이 있으면 일부러 학교에 와서 자연과학대학 앞 호수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그녀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1학년 수업 시간표를 과실에서 복사해갔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그녀가 나오면서 보일 수 있는 멀찍이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희선과 같은 종류의 파마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김 실장님한테 다시 머리를 펴 달라고 했는데, 지금 스트레이트를 하면 머릿결이 수세미가 된다고 했다. 적어도 3개월 있다가 오란다. 곧 입학식인데. 망했다)


친구가 소개팅 이야기를 한 이후 그 여자의 눈에는 그 남자만 들어왔다.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눈썹부터 발톱 끝까지 사랑받고 있는 느낌이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빠져나갈 때는 괜스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우아한 걸음을 걸으려고 노력했다.


(고3 때 찐 살이 아직 빠지지도 않았는데.. 함께 어울리는 은영이랑 신미는 귀엽고 날씬하고 화장도 잘하는데 나는 좀 못생겼어. 얼굴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도 않았단 말이야. 대체 내 볼살은 왜 이리 아직도 통통한지 모르겠어)


아침부터 유난스럽게 머리를 2번이나 감았다. 언니가 해준 드라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의 엄마는, 입술 인중이 뚜렷해서 빨간 립스틱을 바르면 펭귄 같아진다고 하셨다. 스무 살에 어울리는 립밤만 발라도 예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믿지 않았다. 엄마한테 들킬까 봐 언니가 가지고 있는 쥐색 검붉은 립스틱을 들고 나와 버스 안에서 발랐다. 역시 예뻤다.


(얼굴은 여드름 투성이다. 게다가 아토피 피부라서 희끗희끗 버짐이 피어있다. 이마와 볼은 기름기 많은 여드름 피부, 턱과 입술 주변은 아토피 피부다. 우태하 피부과를 다닌 지 7년이 되어가는데, 나이가 들고 호르몬이 바뀌면 좀 나아진다는 말뿐이다. 선생님이 돌팔이가 분명하다)


종로 카페에 50분 전에 도착했다. 미리 들어가 있으면 자신의 사랑이 들킬까 봐 도도한 척 10분 늦게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만나기도 전에 이미 사랑이 시작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학력고사 시험보다 더 떨렸다. 마치 너무 많은 소개팅을 받아본 여자애처럼 보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볼은 통통하고, 아토피 피부 때문에 얼굴은 언제나 벌겋게 열꽃이 피어 있었다. 분명 밥을 안 먹는데 살이 빠지지 않았다. 머리는 아줌마 파마였고, 지성과 건성이 함께 있는 얼굴은 화장이 받지 않았다. 엄마가 입학 선물로 사준 체크무늬 주름치마는 큰 엉덩이를 남산만 하게 보이게 했다. 엄마한테 콘택트렌즈를 사달라고 했더니 잠자리 눈알만 한 금테 안경을 사줬다. 좀 비싸고 눈에 안 띄는 세라믹 교정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내 이빨은 철길이 깔려있었다)


잇몸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아침에 바른 쥐색 립스틱이 예뻤을 거야. 함께 앉아있는 1시간 동안 그 남자는 말이 없었다. 멀리서 그녀를 쳐다봤던 촉촉한 눈빛은 허공을 향해 갈 길을 잃어버렸다. 수줍음이 많은 남자라고 단정 지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자고 하는 그 남자는 여자의 삐삐 번호를 묻지 않았다. 친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친구가 분명 나를 봤는데 다른 길로 들어선다. 나는 친구를 불렀다. 주춤거리며 내 앞에 선다. 그 남자를 잘 만났는데, 1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호수 앞에서 나를 기다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는 이빨 교정기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가까이서 보니까 네가 아니고 너희 언니를 좋아한거였대.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자기가 착각했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6월이었으니 다행이다.

한 달만 있으면 여름방학이 시작하니 창피한 일도 잊히겠지.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우는 나를 위해, 엄마는 콘택트렌즈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싱그럽게 빛나던 나의 스무 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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