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by 오서리
심장 수술받고 다들 5~6년 정도 산다고 했다. 의사도 그랬고..
난 11년째 살고 있으니 오래 산 거지.
별 미련 없다.


시부모님은 이러니 저러니 별 싫은 소리 안 하시는 안동 분들이셨다. 아들 나이 오십에 마흔다섯 살 며느리를 본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셨다. 임신하려고 노력하던 5년 동안 한 번도 아기 얘기를 하지도 않으셨다. “오십에 장가간 것만으로도 우린 감사하다. 그다음은 너희 둘이 알아서 하거라.” 그 말씀에 늙은 며느리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추석 명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려오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추석 2주일 전인 이번 주가 시어머니 생신 주간이었다. 추석 때도 못 가뵐텐데, 생신 겸사겸사 이번 주에 가겠다고 하니 내심 좋아하셨다. 하긴, 두 노인네가 오죽 심심할까.. 손주는 없어도 아들 며느리가 가면 이것저것 음식도 해가고, 집안에 기름 냄새도 나고, 사람 소리 나서 활기차니 좋아하신다. 지난주부터 시장 보고, 음식 하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내려갔다. 고기 구워 드리고, 미역국도 끓여드리고, 집에서 짜장면도 해 드리니 별미라고 좋아하셨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날,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어두운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시아버지가 나오셨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더니 거실에 앉으셔서 당신도 새벽 4시면 일어난다고 하셨다. 한참을 앉아 계시더니, 무거운 입을 떼신다. 신랑과 내가 시댁을 내려가도 2박 3일 동안 한마디도 안 하시는 시아버지이셨다.


심장 수술받고 다들 5~6년 정도 산다고 했다. 의사도 그랬고..
난 11년째 살고 있으니 오래 산 거지.
별 미련 없다.


결혼한 지 5년 동안 단 한 번도 며느리인 나와 둘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시아버지였다. 갑자기, 시어머니 고생 많이 시켰다는 이야기, 난초에 물을 주는데 난이란 게 쉽게 꽃을 피워주지 않는 귀한 식물이라든가, 이젠 화장실 가기도 숨차다는 말씀을 하시며 한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80년 넘게 시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함께 한 양옥집, 컴컴한 시댁 거실에서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간이 멈추어버렸다.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가끔 ‘네’라는 대답만 할 뿐, 그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아마 시아버지는 며느리인 나를 앞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그저 허공에 대고 당신 스스로에게 하시는 인생 이야기 같았다. 시아버지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님, 따뜻한 물 한잔 드릴까요?”

“됐다. 그러다가 니 어마이 깰라..”


며느리를 오래 잡아 놓고 주책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일본에는 ‘하이쿠(俳句)라는 짧은 문장으로 된 문학 장르가 있다. 5,7,5의 3구(句) 17자(字)로 된 시형(詩型)으로 특정한 시기나 계절 등 자연에 대한 서정적 형태를 담는 시형 장르이다. 며칠 전, 일본 노인 요양원 협회에서 하이쿠 공모전을 개최하였고 우수작을 보게 되었다.


일본 노인 요양원 협회 공모전 하이쿠 우수작


나는 연상이 이상형인데 더 이상 없어
전철 개찰구 안 열려 봤더니 진찰권
LED 전구 내 남은 수명으론 쓰지도 못해
도쿄 올림픽 어디서 보려나 하늘인가 땅인가
이 생의 미련 없다고 하지만, 지진에는 도망가
느낌 있는 글씨체라고 칭찬받은 수전증
펜과 종이 찾는 도중에 쓸 문장 까먹어
세 시간 기다려 진찰받은 병명, 노환
만보계 절반 이상이 물건 찾느라
갑자기 의사가 친절해지는 불안
사랑인 줄 알았건만 부정맥

-<일본 노인 요양원 협회 공모전 하이쿠 우수작>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속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그날의 시아버지와의 대화가 생각나게 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제 곧 노인이 될 것이다.

그날의 시아버지의 말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른 뒤 마음을 걸레 쥐어짜듯이 후회하기 전에,

나는 지금 오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참조 :

<일본 노인 요양원 협회 공모전 하이쿠 우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