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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pr 11. 2024

태평성대의 꿈-십장생도 5화

1451년 늦여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무계정사에 모여들었다.

초청받은 사람도 있고,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은 사람도 있었다.


무계정사 주변에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하인, 가마꾼들은 복숭아를 따 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여기 무계정사 주변의 복숭아나무는 여러 곳에서 옮겨 심었다는 말을 들었네.
한양의 권세 있는 집에서는 복숭아나무를 심는다고 난리가 아닐세.”   

  

“안평대군의 뜻이라고 하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이지. 우리야 그 뜻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면 만족하네.”    

 

안평대군이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한다.  

   

“이번 모임은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은 없소.”    

 

안평대군은 현실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몇 년 전 한밤의 꿈에 본 산을 나돌다가
우거진 풀숲 사이로 무릉도원 찾아든 일 있은 뒤로

벼슬 버릴 생각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오늘 와서 터를 닦고 나니 비로소 기쁜 얼굴 됐네.’
(안평대군 무계 수창시 중에서)


박팽년, 성삼문, 서거정도 안평대군과 뜻을 같이하여 정계를 은퇴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세상 일 꿈에도 미련이 없으니
한가로운 구름만이 산문을 잠그누나.
이곳에 마침내 주인이 된다면
하늘인들 어찌 아끼기만 하리-박팽년’


‘깊어가는 봄날에 사립문 닫고 보니
인적도 뜸하고 일도 뜸한 것을 알게 되네.
세속 사람이야 참다운 의미를 어찌 알까
날더러 일이 없어 신선술을 배운다하네-성삼문’


‘선봉은 보일락 말락 서연이 둘러쌌는데
골짝 안에는 분명히 별궁이 보이네 그려
세상 경시하거니 어찌 벼슬에 뜻을 두랴
북창 아래 편히 누우니 귀밑이 선선하네. -서거정’  

   

[몽유도원도/안견/비단에 수묵 채색/38.7×106.5cm/1447년(세종 29)/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무릉도원 이야기에는 성리학이라는 철학과 정치이념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가치가 담겨있다.]     


무계정사 중앙 마루에는 몽유도원도가 펼쳐져 있고 많은 사람이 그림을 감상한다.    

 

“좌우가 바뀐 그림은 처음 봅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뜻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런 구도로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오.”

    

“대학 경전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글이 있소.
사람들은 '수양한 후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그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다음에 천하가 화평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지요.
수신이 먼저이고 평천하가 마지막인데, 이를 순차적으로 여깁니다.”

    

“나도 알고 있소만 몽유도원도와 무슨 관계란 말이오?”  

   

“이 그림은 이런 순서를 뒤집은 것입니다. 만백성이 평안한 평천하를 제일 앞에 둔 것이지요.”   

  

“아하, 그렇군요. 수신, 제가, 치국을 하기 전에 평천하가 어떤 세상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수신제가치국은 평천하를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평천하는 백성이 꿈꾸는 세상입니다.
평천하라는 최종 목표를 모르면, 수신은 개인의 만족으로, 제가는 가문의 영화로, 치국은 권력자만의 세상이 될 위험이 있지요.
이는 민본정치의 본질과 직결된 문제이니, 안평대군께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음, 참으로 부끄럽소. 그동안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했는데, 정작 백성이 원하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공부하고 청렴하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몽유도원도는 높이 38.6cm*길이 106.2cm이다. 감상문과 발문이 붙은 두루마리의 길이는 1,871cm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건국한 나라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성리학이라는 철학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처나 옥황상제 같은 절대자나 사후세계가 없는 사상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절대자를 위한 제사, 푸닥거리, 부적, 기도, 귀신, 영혼 따위는 사람을 미망에 빠트리는 사악한 것이었다.
성리학은 삶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해결하거나 위안을 주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선비들은 사서삼경을 읽고 또 읽었으며 한 문장도 빠지지 않고 외워 암송하기를 반복했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두루마리 첫머리에는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의 제목이 쓰여 있다. 이 제목은 1450년, 그림이 완성된 후 3년 뒤에 정해졌다. 일본 학자가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감상문을 보고 연판장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이 감상문이 살생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 내면에는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림을 한참이나 둘러보던 신숙주가 도발하듯 안평대군에게 묻는다.

    

“대군께서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여러 문인도 그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저는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합니다.
정치는 유학하는 선비의 숙명입니다. 정치를 버리고 무엇을 하시렵니까?”

    

“정치는 문종대왕을 중심으로 신숙주와 같은 능력 있는 관료들이 하면 될 것입니다. 나는 여기 무계정사를 무릉도원처럼 꾸미면서 조용하게 살겠소.”   

  

“대군께서는 만백성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무릉도원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 속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무릉도원도 결국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닙니까? 정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림 속에 사람을 그리면 영웅이 되거나 신격화됩니다. 조선은 영웅이나 절대자를 따랐던 고려와 다르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우주적 본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무릉도원의 주인은 영웅이나 절대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오.”   

  

“대군께서는 현실을 모르십니다. 백성은 아둔하고 어리석습니다. 강력한 힘으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안평대군은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신숙주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꼈다.


성삼문이 위로한다.

    

“대군,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신숙주와는 갈 길이 다르옵니다.”   

  

“어찌할꼬. 조선은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선대에도 그랬듯이 권력 때문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신숙주는 안평대군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결국 배신하고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의 주모자로 참여한다.
1453년, 안평대군은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는다.
무계정사는 폐허가 되었고 몽유도원도는 궁궐 깊숙한 곳에 유배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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