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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Oct 02. 2024

속물의 화신

내가 대학 다닐 때 동아리 친구가 소개팅을 나갔는데 상대 남자가 물어보더란다.

“선아 씨는 언제부터 강남 사셨어요? 부모님이랑 같이 사세요?”

친구 본가는 수원이라 학동역 부근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1년 됐나? 친구랑 자취해요.”

“아, 그럼 부모님은 어디 사세요? 혹시 조부모님 때부터 강남에 사셨어요?”

“아니요. 수원에 계시는데.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3대는 강남 살았어야 진짜 강남 출신이라고 할 수 있죠. 저희는 할아버지 때부터 압구정 토박이거든요.”

“……”

친구는 소개팅을 파하고 와서는 대체 처음 본 사람한테 몇 대째 강남에 사느냐 묻는 게 정상이냐며 재수 없다고 눈을 까뒤집었다.

“네가 되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일부러 그런 거야, 그거. “

나는 실없는 말로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오랫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놈’, ‘그 새끼’를 주절댔다.

결혼정보 업체에서 주선한 만남도 아니고, 이십 대 대학생 둘이 만난 자리에서 ‘찐’ 강남 여자 찾기라니. 은근한 속물은 밥맛인데 그 남자는 너무 ‘순수’ 속물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좀 징그럽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그 애는 3대째 강남에서 나고 자란 여자와 결혼해서 여전히 ‘진짜‘ 강남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어쨌든 행복하기를.


나에게도 당연히 속물근성이 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들고 나는 세상에 사니 ‘안 그런 척’ 하면서 재물운이 따르기를 바라고, 온갖 겸양을 떨면서 은근히 ‘아는 척’하고 싶고, 브랜드가 어지럽게 나열된 ‘대놓고’ 명품백은 싫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로고 없는 명품백 하나쯤은 소장하고 싶고.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래도 속물주의가 스며들지 않도록 애를 쓰는 나만의 성역은 있다. 사람을 ‘돈’으로, ‘학벌’로, ‘직업’으로 구분 짓거나 계급화하지 않기.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보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사람은 귀하다. 허드렛일을 한다고 해서, 급여가 적다고 해서, 학력 수준이 낮다고 해서, 싼 집에 산다고 해서 허름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고귀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조화롭고 균형을 이룬다고 믿는다. 그게 내가 세상을 보는 하나의 굵직한 선이고 기준이다.


나는 사람을 볼 때 0으로 시작한다. 사람에 대한 큰 기대가 없기도 하고, 감정의 기복이 적은 편이라 자극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첫인상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내게는 0으로 들어와서 갈지자로 100을 향해 오른다. 첫눈에 ‘뿅’은 없지만 또 첫눈에 ‘극혐‘도 없다.


그저 사람은 저마다 고유의 색을 띠고,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을 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기질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나와 벗이 되기 쉽고, 어딘가 결이 맞지 않고 불편하면 느슨한 관계가 되거나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에게 계급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사람이다.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인간을 계급화하고 선택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한, 불의를 못 참고 인정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속물근성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어준 속물의 ‘화신’을 만났다.

속물근성에 푹 젖어있는 사람도 대놓고 ‘나 속물 입네’ 드러내놓는 건 꺼려할뿐더러 수치스러워하는데 오늘 만난 사람은 세상을 투과하는 자체 프리즘이 돈과 학벌, 집안이다.

아예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자신의 ‘소중한’ 속물근성을 하나하나 꺼내어 잘 닦아 반짝반짝 윤을 낸 뒤 좌판 물건처럼 펼쳐놓는 격이었다.


“걔네 집에 벤츠 카탈로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너 벤츠도 있어?라고 물어보니 자기 세컨드카라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벤츠 영업점에서 상담하고 매달 카탈로그 구독 신청한 거더라고요. 거지도 아니고. “

“그나마 인서울이라고 해서 사귀었더니 뻥이었어요. 내 학벌에 비해 급도 안 되는 학교 졸업했지만 인서울이라고 하니까… 그래, 착하면 됐지, 하고 사귀어줬더니.”

“자기네 본가가 청담동이래요. 아버지가 자동차 부품 납품 법인을 운영한다고. 자기는 학교 다닐 때 승마가 취미였다고. 근데 그것도 뻥이에요. 부모가 시골에서 농사짓더라고요. 어디 알지도 못하는 지방에서.”

“내 지인 중에 솔직히 서연고(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밖에 없어요. 제까짓 게 어떻게 내 학벌 수준을 만나요? 안 그래요?”

“제 친구들은 주변에 지방대나 전문대도 없어요. 다 고르고 골라서 연애하고 시집도 잘만 갔는데 저만 바보같이 착해서……“


세상에 별별 사람이 다 있다지만 오늘 만난 사람 같은 속물은 난생처음이었다. 이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일관적이었다.

타인의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수준, 학벌을 그 사람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내밀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인 듯이 내게 동의까지 구하다니.


다행히도 이 사람은 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서 내게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조잘대는 말소리가 끓는 물에 뚜껑이 들썩이는 주전자 소리처럼 내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다.  

말의 양도 워낙 많고 빨라서 따라잡기 쉽지 않았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나는 공부만 해서 사람 볼 줄을 몰랐다. 착하고 순진해서 사람을 조건으로 고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인생 망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이야기는 몹시 모순적이다. 결국 상대가 ‘벤츠를 타는 줄 알고, 본가가 청담동인 줄 알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집안인 줄 알고 학벌이 제 기준에 못 미쳤지만 택한 게 아닌가?’ 이게 왜 순진한 거지? 제 기준 대로 고르다가 ‘사기’의 덫에 걸려든 것을. 그야말로 자승자박 꼴인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긍정도 부정도 어떤 추임새도 없이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종종 남의 말을 듣는 일은 힘에 부친다. 말을 하는 것보다 힘들 때가 있다. 특히 남의 말이 부정적인 에너지가 되어 덩어리째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오면 감내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커피를 내리든가, 일 없이 탕비실에 다녀오기도 한다.

오늘 온 사람의 말은 무게 없이 나풀나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데도 ‘언’ 해전술로 밀고 들어오니 영 소화가 안되었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만큼 아픈 것도 없죠.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네요.”

그녀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믿은 사람에게 발등이 찍힌 아픔 자체에 공감을 했다. 자신의 사람 보는 관점이 몹시 이상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네 말은 원천적으로 틀렸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이야기할 주제도 못 되고, 여기가 말할 자리도 아니므로 이 정도의 공감으로 속히 대화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굵은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더니 아예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적이 당황했다. 이 여자가 내게 직전에 한 말이 무엇이었나, 되짚어보았지만 행간을 들쑤셔봐도 오열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나 건너편 테이블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 아이고, 정도의 낮은 탄식으로 미온적인 위로를 전하며.


그녀는 한참을 들썩이더니 고개를 반쯤 들고 입술로, 턱으로 흘러내린 눈물, 콧물을 정신없이 닦아냈다.

“우리 엄마는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왜 다른 애들처럼 예뻐해주지 않아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

그녀는 말을 토해내며 아기처럼 울었다. 끅끅 소리를 내며 흐느끼느라 한 문장을 맺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이 오늘 처음으로 내게 와닿았음을 느꼈다.

그녀도 자신의 인생이 모순으로 점철된 선택으로 이어져 왔음을 아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결핍된 ‘작은 아이’로 머무른 채 몸만 어른이 되었으니 그녀의 마음은 온통 불안이었다.

계급이나 지위, 명성이 인정과 가짜‘애정’으로 연결되는 사회에서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속물근성이 불안을 막아주는 유일한 방패요, 힘이 된 셈이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있는 사람,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타인을 쉽게 깎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약한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자라난 열등감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고 평가하기 쉽다.

오늘 만난 사람은 자신이 성장할 때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기에 결국 이런 인생을 살고 있노라며 힘겹게 고백했다. 결국 자존감이 약해서 자신은 늘 ‘틀린’ 선택을 한다면서.

부모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애정의 결핍, 그 텅 빈 마음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속물적인 방패막이를 빙 둘러 세우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애쓴 모습이 가엽고…… 짠했다.


그녀는 그 후로 더 이상 내게 학벌이나 돈, 사회적인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애써 둘러놓은 방패가 하나 둘 쓰러지니 마음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본 자신의 이야기를 잇고 또 이었다.

나는 상처투성이인 ‘작은 아이’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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