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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Sep 28. 2024

이방인에게는 조금 더 다정하게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나는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했다. 취업 전선에서는 비인기 전공이고, 학과 통폐합이 거론될 때 언제나 우선순위에 올랐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학문에 애정이 깊었다. 우리 학교만의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사랑했고, 인문학이란 발원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철학과 문학이 한데 뒤섞인 내 전공과목을 좋아했다.

‘불행히도’ 이렇게 현실 감각 떨어지는(?) 사람은 나뿐이라 동기들은 나를 땅에 발 붙일 틈 없는 극이상주의자로 부르곤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동기들이 앞으로 먹고살 일을 걱정하며 교육이나 경영을 복수 전공으로 선택하고, 편입을 준비할 때 나는 꿋꿋이 전공만 팠다.

순수학문 전공 학도로서의 신분이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아서 얼렁뚱땅 졸업증만 따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때 교환학생 격의 해외 교류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독일 본대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독일문화원에 다니며 어학 공부를 했지만 현지에 나가보니 별 쓸모가 없었다. 뭐든 일상에서 부딪혀 새로 배워야 했다.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드는 일, 기숙사를 배정받고 확인하는 일, 교통편을 알아보고 기차표를 예약하는 일, 학교 강의를 신청하는 일 등 나는 생활하는 모든 일에 완전한 새내기였으므로 현지인이 커피 마시고 수다 떠는 일 같은 사소한 일상을 내가 직면할 때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외국에서 여행자가 아닌 생활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세계에 무단히 틈입한 이방인이자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조로운 현지 적응을 위해서는 낯선 길에 내딛는 걸음마다 불안과 고독이 들러붙어 매 순간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에 속히 익숙해져야 했다.  


독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이견 없는 선진국이라 현지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에 이방인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서려있었다.

나는 잘못하는 것 없이 그들의 말을 잘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독일에 간 지 며칠 안 됐을 때 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계산을 하는데 캐셔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 들었나 보다.

그녀가 내 동전 지갑을 우악스럽게 빼앗더니 지갑 속 돈을 휙 꺼내어 계산을 하고 잔돈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

나를 하대하여 인종의 우월성을 ‘정당화’한 이 오만방자한 여자의 몰상식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나는 맹추처럼 별 말을 못 하고 나왔다.

‘아기처럼’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덜 우스워 보일 것 같아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새로운 일상을 홀로 직면해야 한다는 의미고, 오롯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홈그라운드처럼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붙잡아 도움을 청하고 하소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롭고 고단한 나날이었다.

해가 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독일의 흐리고 으스스한 날씨도 나의 마음에 쉽게 그늘을 드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종종 생각했다.

돈을 벌어 본국에 있는 식솔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 더 좋은 직장을 다니기 위해,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먹고사는 일에 걱정을 덜기 위해서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독일에 사는 나를 종종 바라보았다.


낮시간이었는데도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어 어둡고, 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어느 날이었다.

터키 이민자가 파는 케밥을 사서 길거리에서 먹고 있는데, 오며 가며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는 독일 사람들 시선이 뭔지 모르게 낯익었다.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서 내가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를 볼 때의 눈빛을 보았다.

뼈가 빠지게 몸을 움직여 중노동으로 먹고사는 외국인들을 보는 나의 눈길은 그때 그들에게 어떻게 닿았던가.  

“얘네들이 우리를 보는 게….. 우리가 한국에서 동남아 노동자들 보는 거랑 비슷하겠죠? “

나는 이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지인에게 내뱉자마자 불편해졌지만 나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고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사무실에 인도네시아 사람이 찾아왔다. 그녀는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허리에 셔링이 잡힌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경기도 북부 어느 지역에 있는 피혁공장에서 3교대로 일을 했는데, 급여의 80%를 본국에 있는 부모에게 송금한다고 했다.

몇 년만 한국에서 일하면 고향에서 번듯한 집을 사고, 동네에 작은 가게를 낼 수 있다며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매일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무실의 정적과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앉지도 서지도 못한 묘한 자세로 우왕좌왕하더니 종내 나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Hi! come in and please have a seat.”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우리말을 할까, 영어를 할까 고민하다가 서로 언어의 장벽을 깨는 데는 영어가 아무래도 공평할 것 같아서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 한국에 체류한 지 2개월도 안 되어 우리말에 능숙하지 않을 터였다.

우리말에 서툰 외국인 앞에서 현지인이 모국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쪼그라들게 할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 톤 높였고, 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의 불안은 내가 잘 아는 불안이므로.

“Thank you.”  그녀는 상담 테이블 의자에 새우처럼 옹크리고 앉아서 눈만 두리번 댔다.  

“coffee or tea?”

“That’s ok. 한꾸말 쪼금 해요. “

“아…네. 혹시 제가 하는 말이 이해 안 되시면 편안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손바닥에 스민 땀을 허벅지에 쓱 문질렀다. 면직 소재의 원피스에 금세 구김이 갔다.

나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과 자신의 방어 본능이 불안한 눈빛에 투영되어 있었다.  

“제가 오늘 나디아(가명)씨 일을 도와드릴 거예요. 모르는 단어는 영어 섞어서 쓰셔도 되고, 안 되면 인도네시아어를 핸드폰에 적어서 보여주세요. 제가 번역해서 이해해 볼게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친구한테 말씀하시듯 천천히 편안하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했고, 그녀는 나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게 몸을 기울여 경청했다.


반짝이는 눈과 벌어진 입 사이로 여전히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들어올 때 바짝 경직되었던 심신의 근육이 처음보다 많이 느슨해졌는지 그녀는 점차 내게 몸짓으로, 고갯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다.

나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어서 토박이와 이방인의 경계를 틈입하기를 바라며, 그녀가 표현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모든 감각을 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유 없이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돈을 벌기 위해 혈혈단신 용감하게 바다를 건너온 그녀가 안심하기를 바랐다.

내게는 영 생경한 세계였던 독일에서, 내가 독일사람들에게 간절히 바랐던 그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잘 왔어요. 편안하게 이야기하세요. 어떤 방법으로든 소통할 수 있어요. 기다려줄게요. 천천히……천천히.’

외국인에게 거리낌 없이 불친절했다기보다 무심한 눈길에, 묵중한 침묵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던 독일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오늘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안심해도 좋아요.’라고 마음을 전하는 ‘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독일에 체류한 지 몇 개월 지나고 나서 제게도 독일 친구들이 생겼어요. 그들과 마음을 나누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친해지니 그들의 우정은 변치 않더군요. 다만 문화가 다르고 언어에 자신이 없었던 제가 그들에게 느꼈던 첫인상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D 저는 독일을 정말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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