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두오모 성당 광장 중앙엔 19세기 이태리 통일 후 국왕으로 추대된 비또리오 에메누엘레 2세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 사이에 지붕으로 덮인 긴 통로의 아케이드가 있다.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갤러리)다.
이태리 패션 중심지인 이 아케이드는 19세기 후반 세워졌다. 200미터쯤 되는 긴 통로와 100m쯤 되는 짧은 통로가 십자가처럼 교차된다. 돔형의 유리 지붕은 철골 구조물로 받치고 있는데, 바닥은 휘황찬란한 대리석으로 돼있어 여기가 이태리임을 다시금 환기시켜 준다.
아케이드 중간의 둥근 천장으로는 하늘이 보이는데 높이가 47m에 달한다고 하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고급스러운 카페와 함께 프라다 본점 등 이태리 명품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내 생애에 본 것 중 가장 아름답고 럭셔리한 쇼핑몰이 아닐까 싶다.
아케이드는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인파를 끌기 마련인데 밀라노의 아케이드 안은 어찌나 안락했는지 도심 속에 거대한 응접실이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실내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성당같이 울리는데 대리석 바닥에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아케이드의 풍경을 사생하고 있었다.
베냐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궂은날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기에는 두오모 곁에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갈레리아 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아케이드는 쇼핑뿐만 아니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물건 구경, 사람 구경하면서 어슬렁거리며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곳이다.
아케이드가 처음 등장한 곳은 파리다. 졸라의 소설 『나나』(1879년)엔 고급 매춘부 나나가 기둥서방인 늙은 백작과 아케이드를 거니는 장면이 나온다. 나나는, 과거 해진 신발을 신고 가게 앞을 떠나지 못했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아케이드 진열장 앞서 황홀해한다.
나나는 아케이드에서 순수한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물건에 투사된 파리 중산층 부인 또는 귀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낭비 욕을 채우면서 닥치는 대로 자신의 정부와 애인들을 파산시키고 이를 자랑으로 여기며 파멸의 길을 걷는다.
아케이드가 쇠락하며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등장한 쇼핑몰이 백화점이다. 70년대 인천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일부러 서울을 올라가 반도조선 아케이드도 가보고 새로 생긴 명동의 코스모스 백화점을 혼자 쏴 돌아다닌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민망한 기억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당국이 귀순한 남파간첩들에게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제일 먼저 데리고 갔던 곳이 백화점이었다. 일요일이면 신자들이 교회를 가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백화점은 시민들이 찾아가는 ‘자본의 예배당’이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에도 비로소 상가나 백화점을 배회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년)의 주인공 구보는 서울 거리와 화신백화점을 할 일 없이 배회한다. 그러한 배회 속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이야기한다.
이상의 「날개」(1936년)에는 기이한 부부가 등장하는데 서로 간에 대화가 전혀 없다. 돈으로 매개되는 물질적 관계 외에 그 어떤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돈을 줘 같이 잠자리를 하는 관계를 맺고 돈이 떨어졌을 때 더 이상 그 관계라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
어느 날 남편은 집에서 내쫓기자 거리를 쏘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을 오른다. 미스코시는 지금 소공동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이다. 1930년 세워진 이 백화점은 한국 백화점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는 분수대, 정원과 함께 갤러리 시설도 갖춘다.
주인공은 백화점 옥상서 혼탁한 회색의 거리의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백화점은 돈만 있으면 뭐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화폐가 없는 사람들에겐 수많은 상품이 진열된 곳이 아니라, 소비의 실천자가 될 수 없는, 수요 불가능성이 집적된 장소로 변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