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소녀 하이디 얘기가 아니고 스위스 할머니 얘기다. 나이 먹어 여행을 하면 여행 중 만나 젊은이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쪽도 꺼려하지만 나도 알아서 피한다. 단 노인네 특히 할머니들은 나 같은 외국인들이 얘기를 걸면 대부분 반갑게 대해준다.
루체른 시내의 그래도 괜찮은 중국음식점이었다. 식당 안은 한가했는데 이미 식사를 하고 있던 두 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요리를 시켜 술도 한 잔 하고 있던 것 같았다.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자꾸 우리 부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뭔 말을 걸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둥글둥글하게 생긴 할머니가 어느 나라서 왔냐고 물었다. 자기는 아주 오래전 일본 남자와 산 적이 있는데 문화와 사고의 차이로 헤어졌다고 한다. 초면에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수다스럽다는 얘기인데, 옆자리에 앉은 칼칼하게 생긴 친구 할머니도 소개해줬다.
그 할머니야 말로 내 기준서 볼 땐 전형적 스위스 할머니였다. 일반 유럽 여자들과 비교해서 왜소하고 마르고 날카롭게 생겼다. 파리서 음악학교를 다녔다는데 라흐마니노프를 즐겨 연주한다고 했다. 나는 라흐마니노프는 화려한 기술과 힘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의외라 했다.
할머니는 배시시 웃으며 그렇잖아도 자기는 무대 심장이 약해 연주가로서 활동한 적은 없고 지금도 남 앞에서 연주할라치면 술 한 잔은 걸쳐야 한다고 농담 비스름하게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알프스가 보이는 루체른 호숫가에 라흐마니노프의 별장이 있었다고도 들은 것 같다.
할머니들이었기에 이런저런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식사 후 피카소의 후기 작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로젠가르트 미술관을 방문코자 한다 하니, 아주 신이 나서 일부러 우리를 그 앞까지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또 한 번은 융프라우가 눈썹 높이로 보이는 뮤렌 봉우리로 가는 산악열차에서였다. 아주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야무진 등산복 차림으로 큰 배낭을 메고 옆 자리에 앉았다. 젊은 시절 인도에 가서 선교사 생활을 했다고도 한다. 혼자서 산행을 하는 거냐니까 그렇다고 한다.
우리는 열차서 내려 가까이에 있는 ‘에델바이스’라는 관광지 식당서 식사나 하고 되돌아갈 요량이었다. 할머니는 산장 숙소까지 올라가서 하룻밤 묵고 갈 거라 한다. 자식들이 생일 때 보태준 돈으로 매년 기회가 되면 이렇게 혼자서 산행을 한다고 했다. 스위스 할머니다웠다.
고작 스위스 할머니 몇 명을 보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우습지만, 사실은 한국사 연구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그녀는 1935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공부하느라 한국에 머물렀던 적도 있다.
현재는 런던 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그녀가 한국사 공부의 길에 들어서게 된 데는,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름답고도 슬픈 사연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고 남편도 1960년 하버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이힐러가 하버드에서 보낸 첫 해, 기말 논문을 쓰면서 어떤 중국 서적이 필요했는데 알고 보니 한 한국인이 그 책을 먼저 대출한 상태였고 이렇게 우연히 다가온 인연이 그들을 연인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독일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던 남편은 1966년 취리히에서 마흔도 안 돼 세상을 떠난다. 도이힐러 말을 빌리자면 “짧지만 격렬했던”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난 것이다. 조국의 운명에 늘 관심이 많았던 남편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그 때문에 귀국이 어렵기도 했었다.
결국 도이힐러는 혼자가 돼 자신의 학문적 필요성과 시댁 방문을 위해 1967년 가을 한국을 찾는다. 시댁은 경북 영천의 조그만 시골로 남편의 집안은 수 세기 동안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도이힐러는 시댁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한국사를 몸으로 공부하게 된다.
시댁의 추석 등 명절 차례, 제사를 참관하고 영남 지방의 양반가옥, 향교, 서원 등을 방문하면서 풍부한 자료를 얻는다. 그것은 그녀의 학문 주제인 한국의 유교, 친족, 신분제 등을 논의하는데 상상력과 영감을 불어넣었으리라. 그리고 저 세상 남편도 늘 그녀와 함께 했으리라.
나는 한국사를 보는 도이힐러의 시각이 신선해서 좋다. 그녀의 저서 『조상의 눈 아래서』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은, 조선사회가 불평등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밝히기보다는, 무엇이 그렇게 불평등한 사회를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로 묶게 했을까? 하는 지속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이힐러는 그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한적 사료, 제사 등의 의례, 조선 시대의 종법, 족보, 과거‧상속제도 등을 정밀하고 끈질기게 살펴나간다. 알프스 뮤렌 봉우리를 혼자서 야무지게 오르던 할머니에게서 도이힐러를 떠올린 건 그냥 나의 상상의 자유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