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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Aug 30. 2020

체코 올로모우츠, 두 개의
랜드마크

체코 관광책자에, 프라하의 붐비는 인파를 피해 중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올로모우츠로 가보라는 안내가 나온다. 사라진 옛 왕국 모라비아의 중심지였던 올로모우츠는 진짜 그런 곳이다.


호텔 문을 나서면 중세의 첨탑과 유럽의 옛 지붕들이 골목의 비좁은 하늘을 가리고 있고, 돌길 어디선가 수도원 승려가 걸어갈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조용한 도시의 중앙광장으로 나가면, 도시의 ‘랜드마크’ 격인 ‘성삼위일체 석주’와 ‘천문 시계탑’이 나타난다.   


올로모우츠 골목길



삼위일체 석주는 쉽게 페스트 탑이라고들 부르나, 18세기 초 이 지역을 강타했던 역병을 극복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체코 전역에 이 같은 역병 퇴치 기념비가 많지만, 올로모우츠의 것은 35m로 최고의 높이에다, 중부 유럽서 바로크적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땅거미가 지면 어둠 속에서 더 위용을 발하는데, 역병을 이겨낸 감동과 신에 대한 찬양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바흐의 현란하고 장엄한 오르간 곡을 건축물로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  


최근 코로나 19를 겪다 보니, 이 석주가 다시 떠올랐다. 인류사에서 페스트, 천연두 등의 역병들은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데포우가 지은 「전염병 연대기」(1722)에는 런던에 역병이 창궐하자 시장이 명령을 내려, 의사들이 4만 마리의 개와 20만 마리의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들의 공포가 빚어낸 잔인한 행동의 결과다. 공포의 역병이 물러갔을 때 인간들은 얼마나 안도감과 함께 신에게 감사했을까? 



성 삼위일체 석주



올로모우츠의 바츨라프 성당을 가면, 성당의 부속건물 벽에 모차르트의 흉상이 부조로 새겨있다. 모차르트가 11살이던 1767년 오스트리아 비인에 천연두 역병이 돌았나 보다.(올로모우츠에 역병이 지나간 이후였던 것 같다.) 어린 모차르트 역시 누이와 함께 감염되자, 그의 아버지가 당시 비인과 가까웠던 이곳으로 가족을 부랴부랴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병에서 회복하고 교향곡 6번을 완성하는데, 이를 올로모우츠 시가 기리는 것이다. 역병은 인간의 역사 어디에서나 늘 기웃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츨라프 성당과 모차르트 부조상


삼위일체 석주가 있는 광장을 내려다보는, 올로모우츠의 또 다른 랜드마크가 시청사 천문 시계탑이다. 이 시계탑은 프라하에도 있고 그곳에는 늘 관광객이 바글댄다.


올로모우츠 시계탑은 프라하보다 조금 늦은 15세기에 세워졌음에도, 프라하 것이 아주 오래되어 낡은 느낌이 나는데 비해, 올로모우츠 것은 신식의 모습이다. 실제 올로모우츠 시계탑은 2차 세계대전 말 후퇴하는 나치 군대의 수류탄에 파손돼, 그 잔해물들이 한동안 박물관에 보관돼 있었다. 


1955년 공산 체코 시절 복원되는데 이때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으로 변형된다. 정각에 수탉이 울면 인형들이 창문을 통해 차례로 등장하는 건 프라하 시계탑과 똑같지만, 인형들은 예수의 열두 제자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표하는 광부, 공장 노동자, 제빵사들이다.


중심 파사드에는 레닌 모를 쓰고 공구를 든 노동자와 플라스크를 든 화학자의 모자이크가 있다. 옛날부터 있던 16개의 종은 ‘인터내셔널가’를 연주했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반발로 체코 민요를 연주한단다. 심지어 시계 밑 절기를 표시하는 달력엔 소련 스탈린의 생일 날짜도 있다. 


시청사와 천문 시계탑

호젓한 중세 도시 올로모우츠 이건만, 이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역병, 전쟁, 정치의 역사가 곳곳에 숨어 있다. 현재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19의 공포 속에 있다. 나 역시 정년을 코앞에 두고 팔자에 없는 비대면 수업을 하느라 전전긍긍하지만, 이런 사태를 겪으면서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익숙했던 방식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역병은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코로나로 산업구조도 바뀌며 실업자가 양산되는 불안한 상황이나, 노동 여부와 무관한 ‘기본소득’과 같은 미증유의 기획들이 제시되고 있어 또 다른 희망을 가져 보는데, 이는 인문학 공부하는 이의 순진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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