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트나 호라(Kutna Hora)를 간 건, 순전히 ‘해골성당’의 소문을 듣고 서다. 프라하서 기차로 한 시간 걸리니 프라하 왔던 관광객이 시간이 남으면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안성맞춤이다.
해골성당이라니 어째 으스스한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이보다는 해골을 보고 비위나 상하지 않을까 싶어 썩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해골성당, 아니 세들레츠(Sedlec) 성당을 가면 경내에 묘지도 있고, 해골이 있는 곳은 지하 예배당이었다.
입구부터 두개골을 매달아 놓은 체인 장식물이 관광객을 맞는다. 엉덩이뼈와 대퇴골로 만든 성배와 십자가도 있고, 천장 샹들리에는 인체 각종의 뼈들을 조합해 만들었는데, 두개골 안에는 촛대의 불꽃이 타올랐다.
가지각색의 수많은 해골들을 보다 보니 나중에는 해골도 그냥 일상이었다.
이 성당에 묘지가 조성된 건 13세기부터인데, 납골당 해골들을 이렇게 성당의 장식물로 가공한 것은 1870년에서란다. 나는 성당에서 도대체 왜 이런 걸 조성했는지 궁금하다.
유골이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이었는지, 현세의 인간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신에 대한 봉헌의 제물로 쓴 것인지 요령부득이었다.
관리소 측 말로는 가끔 해골에 선글라스를 씌우거나, 키스까지 하며 인증사진을 찍는 불경스러운(?) 관광객들이 있어 주의를 준다는데, 해골을 이런 장식물로 만든 자체가 애초부터 사자에 대한 모독 행위 아닌가?
내 개인적으로는 해골성당보다는, 쿠트나 호라의 올드타운에 있는 바르보라 성당이 더 인상적이었다.
유럽 관광을 하고 온 한국 사람들은 성당 소리만 하고 성당 그림만 봐도 멀미가 난다고 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성당을 구경하고 다니게 된다.
체코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라하에 가면 프라하 성의 비투스 성당이 여행 일정에 꼭 들어가 있다. 그런데 바르보라 성당을 축조한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비투스 성당을 설계한 자의 아들이다.
고딕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비투스 성당이 웅장하기는 하지만, 바르보라는 후기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비투스 성당을 따르면서도 이를 창조적으로 변형했다. 뾰족한 텐트처럼 쳐진 세 개의 독특한 첨탑 지붕과 이를 받쳐주는 날아갈 것 같은 늑재들이 꽤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 조그만 도시에 프라하에 버금가는 이렇게 큰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13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 이 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되고 은화를 만드는 화폐 국이 생기면서 도시가 번창했기 때문이다. 성당에는 광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조형물들이 눈에 띄었다.
이 도시의 은광 경기는, 16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서 은광이 개발되며 침체되는데, 이런 탓으로 14세기 시작된 이 성당의 공사는 사이사이 중단되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완공을 보게 된다.
나는 이른바 ‘나이롱 신자’이기도 하거니와,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서 특별한 종교적 감회를 가져보지는 않았는데, 이 바르보라 성당의 경우는 좀 달랐다. 성당 건물 자체가 아니라 성당 주변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 성당은 아주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 시가지를 굽어보며 약간 경사진 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오르는 길 양쪽으로 성상들이 도열해있어 성당으로 예배를 보러 가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체코의 가을은 유독 빨리 오는데 내가 갔던 계절은 11월 초라, 성당 주변 나무의 잎들은 색깔이 다 바래가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성당에서 굽어본 보헤미아의 고도는 점점 우수에 차가는데 그 쓸쓸함에서 오히려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는, ‘삶이라는 고통의 한낮을 지나 죽음이라는 상쾌한 저녁’(하이네)을 향해 가는 것 같아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다. 종교란 자고로 이래야 되는 거 아닐까?
요즘 뉴스 화면에 껌뻑하면 등장하는 두 개의 첨탑이 솟은 성북구 장위동의 모 교회는 ‘친박’과 태극기 부대의 울화병은 풀어줄지 몰라도,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