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가려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를 탄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한 나라인 적도 있지만 브라티슬라바는 거리상으로 프라하보다는 부다페스트에 더 가깝다. 실제 슬로바키아는 오랜 기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고, 브라티슬라바는 한때 헝가리의 수도이기도 했다. 브라티슬라바는 비엔나와도 아주 가까워(차로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합스부르크 제국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의 호사스러운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도시에 각별한 애정을 두고 머물기도 해 그녀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그런 탓인지 대단히 작은 규모의 도시지만 성이나 궁전, 성당들이 나름 꽤 유서가 있어 보이고,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거리의 사람들이나 관광객들도 멋쟁이들이 많았다. 브라티슬라바는 반나절도 안 돼 시내 구경을 다 할 수 있기에, 저녁에는 슬로바키아 국립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를 가기로 했다. 애초 우리 부부는 오페라 생각이 없었는데, 동행한 K교수가 그곳 대사관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예약을 부탁해 보게 됐다.
오페라 관람을 꺼린 이유 중 하나는, 서양인들은 오페라에 정장하고 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 부부는 여행복에 운동화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 게, 유럽 딴 데서 온 단체관광객들도 캐주얼 복장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날 공연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인 <티토 황제의 자비>다. 첨엔 화려한 네오르네상스식의 극장 건물에 감탄도 했건만, 오페라에는 유명한 아리아가 없어 좀 지루했고 아내는 민망할 정도로 졸았다.
한바탕 졸던 아내는 오페라가 끝나자 눈이 다시 반짝반짝 해졌는데, 극장 로비에서 덴마크서 온 노부부 관광객과 우연히 마주치면서였다. 나는 그들을 무심히 봤는데 아내는 이 부부가 커플 옷차림을 하고 온 멋쟁이라 칭찬하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의했다. 그들 부부는 흔쾌히 수락했는데 아내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이들 부부는 캐주얼 복장이기는 하지만 윗도리는 빨간색으로 벨트와 목걸이는 비슷한 디자인에 아래는 검은색 바지를 맞춰 입고 있었다. 여행길에도 오페라 관람을 위해 나름 센스 있는 준비를 한 셈이다.
솔직히 나는 멋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내는 애들한테, 자기는 처녀 시절 배우자를 고를 때 얼굴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연애 초기 내가 목까지 올라오는 ‘도쿠리’ 스웨터를 입고 나갔는데 뒤집어 입고 나온 걸 전혀 모르더라는 얘기도 덧붙인다. 나는 덴마크 노부부의 센스가 부럽긴 했어도, 그들 멋쟁이를 보는 마음은 왠지 즐거웠다.
다음날은 옛 시청사를 개조한 브라티슬라바 역사박물관을 갔다. 박물관 중정으로 나가니 회랑에 피아노가 있었다. 연인 사이로 보이는 남녀인데, 남자는 여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피아노에 기댄 여자는 남자에게 매력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연주보다는 두 사람 간 포즈가 멋있었다. 내가 피아노를 조금 딩동 대는 것을 아는 아내는 나 보고도 연주를 청했다. 나는 ‘소녀의 기도’나 ‘엘리제를 위하여’ 정도를 겨우 연주하는 수준인데, 그나마 암보로 연주하는 게 없어 사양했더니 아내가 꽤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내도 유럽 사람들 앞에서 그 연인들과 같이 멋있게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쩝~
여행 중 멋쟁이들을 구경하는 것은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우리 학교 일본학과의 멋쟁이 선생님이 해줬던 말이 있다. ‘일생감동 일생청춘’ 즉, ‘아름다운 일이나 아름다운 사람에 감동할 수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청춘이다.’라는 말이다. 비록 나는 멋을 낼 줄도 모르고 멋을 내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여행하면서 멋쟁이들을 보면 설레기도 하고 감동(?)마저 받는다. 이 세상 살면서 이런 감동조차 못 느끼고 산다면 과연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갈까 싶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