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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Sep 13. 2020

귀엽고 예쁜 도시 텔치에서 프라하 집으로 돌아오며

텔치(Telč)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도시를 찾은 건, 체코 문학을 전공한 한국인 지인을 쫓아서다. 체코는 옛날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텔치는 이 두 왕국의 접경지여서 교류가 활발해지며 생겨난 도시라 한다. 프라하에서 한 150km 되는 거리인데, 우리의 일 차선 지방 도로 같은 곳으로 가기에 버스로 3시간 가까이 걸려갔다.

 

그곳에 이렇게 귀엽고 예쁜 도시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원형이 아닌 길쭉한 광장 양쪽으로 관병식 하듯이 늘어선 르네상스 또는 바로크 풍의 집들을 보고 사극을 찍는 영화 촬영장에 온 걸로 착각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휙 날아간 느낌이랄까?


이 도시가 체코 내륙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전쟁 같은 것들을 덜 겪은 탓으로, 16세기 당시 세워진 거리와 건물들이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텔치 광장의 집들


광장 거리를 지나 텔치 성으로 가니, 안내인이 이 성은 건물 인테리어를 비롯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성이라고 얘기해준다. 성주(城主)가 이탈리아도 여행하고 그곳 건축 장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자신의 이탈리아 취향을 충족시켰다고 한다.


반면 성 안의 뜰은 영국식 정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같은 유럽 나라지만 체코 역시 이탈리아나 영국의 문화를 부러워하고 좇으려 했던 것 같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풍의 텔치 성(위)과 영국식 정원(아래)


그러나 텔치를 둘러보면 다른 나라를 좇긴 좇되, 그들 나름의 개성을 발휘해 모방과 창조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텔치 안의 기념품 가게를 가보니, 체코도 나름의 정교하고 내공 있는 문화를 가진 게, 프라하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나무로 만든 인형, 장난감, 각종의 놀이용품 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 진열돼있다. 대부분이 핸드메이드 아니면 수많은 공정을 거쳐 이뤄지는 수공 제품들이다.


체코는 EU 국가 중 최대의 장난감 수출국이다! 체코의 인형극이 정평이 난 것도 다 이와 관련된 듯싶다. 고등학교 때 지리 시간에 체코의 주요 산업으로 기관총과 같은 무기 제작 등의 기계공업 분야를 배운 기억도 떠올랐다.



기념품 가게의 나무 인형, 장난감, 놀이용품


텔치의, 가을을 머금은 차분한 마을 호수 분위기도 좋았고, 분위기에 취해 맥주 집을 둘렀다. 체코인들도 자신의 고장서 생산되는 맥주를 고집하는데, 텔치의 맥주는 예체크(Ježek)라는 라거 맥주다. 요즘 우리 국내에서도 마실 수 있는 흑맥주 ‘꼬젤’이 ‘염소’를 가리키는 단어이듯이, ‘예체크’는 ‘고슴도치’의 뜻이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지만 체코어를 하는 지인은 금발의 맥주집 주모와 시시덕거리다가, 그만 저녁 6시 프라하로 가는 막차 버스를 놓쳤다. 


가을을 머금은 텔치의 호수
예체크(고슴도치) 맥주집에서


프라하로 가는 직행 열차는 없어 몇 번 바꿔 타고 가야 했는데, 10월이라 날은 금방 어두워지고 열차 편을 알아보고 환승역을 찾아 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체코의 시골은 유난히 캄캄했고 열차에 합석한 남자는 동구권 영화에 잘 등장하는 우울한 얼굴형의 아저씨였다. 그래도 자기 배낭서 부스럭대며 맥주를 꺼내 우리에게 권했다. 난 별생각 없이 마셨는데, 지인은 여행 중 모르는 이가 주는 술을 덜컥 받아먹지 말란다. 뭘 탔을지도 모른다며 …    


오밤중이 돼서야 블타바 강 불빛이 보이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당시는 프라하서 두 달을 채 살지 않은 시기였음에도, 마치 내 고향집에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과 행복감에 젖었다.


군대 시절 처음엔 훈련소 내무반이 그리도 낯설었는데, 일주일간 유격장을 돌다가 와 보니 내무반이 고향집 같았던 생각이 난다. 나는 체코에 일 년 간 있으면서도 프라하 집을 떠나 열흘을 넘어 여행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스태미나도 형편없는 데다 여러 잠자리를 떠돌다 보면 프라하 집의 안온한 일상이 금방 그리워졌다.


사람이 간사한 게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가도, 낯선 곳을 다니다 보면 익숙했던 일상이 금방 다시 그리워진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이러고저러고 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프라하로 돌아오는 환승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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