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폴란드의 옛 도읍지 크라쿠프였다. 거기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버스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시간이 많으면 몰라도 우정 그런 우울한 곳에까지 가고는 싶지 않았다. 그런데 크라쿠프서 자투리 시간이 남아 오전 내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결국 그곳 가는 버스를 타게 된 것은 낮 12시가 넘어서다. 터미널 가서 아우슈비츠행 버스를 찾는데, 알고 보니 그 지명은 독일식 이름이고 폴란드말로 ‘오시비엥침’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크라쿠프로 돌아오는 막차가 저녁 6시 30분이라 서둘러 갔지만, 도착해보니 수용소 관람은 예약제로 가이드 인솔 아래 이뤄지며, 예약을 안 했을 경우 자유 관람으로 오후 4시 넘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수용소 내 몇 군데를 엉터리로 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올 때 마음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착잡했다.
수용소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쓸쓸한 흙길이 시작되는데, 바깥에서 떠들던 관광객들도 이 안으로 들어서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연해진다. 애자가 달린 전기 철조망과 이를 굽어보는 감시탑, 28개 동이나 되는 붉은 벽돌의 수용 막사가 그대로 있고, 유물도 현장에 있던 증거물들이 대부분인 이곳은, 수용소 자체가 박물관이다. 아내는 끔찍하다 말했다.
시체 소각장의 용광로, 공개 총살형이 이뤄지고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죽음의 벽’은 당연히 공포감을 느끼게 하지만, 오히려 일상의 공간인 단체 화장실의 녹슨 변기들에서 수용자들의 처지가 실감으로 다가왔다. 화장실 중앙으로 소변기가, 소변기 양쪽엔 대변기가 늘어서 있다. 서로 일 보는 모습을 보고 보이는 그곳에서, 수용자들이 가졌을 수치심을 생각해봤다. 푸른 줄무늬 죄수복 차림으로 번호표를 단 정면 또는 측면 사진은 수용소에 들어오면서 신상 파악을 위해 찍은 것으로, 공포와 당혹의 표정이 역력하다.
수용자들은 입소하면서 가져온 모든 물건을 압류당하는데 심지어 삭발당한 머리카락을 모아 놓은 전시실도 있다. 이것을 직물로 짜내기도 했다고 한다. 1942년 들어서 인근 지역사회에서는 수용소로 납품되는 살충제 주문량이 급작스럽게 증가하는데, 당시 가스실에 살포된 가스 깡통들이 무더기로 쌓여 전시돼 있었다.
더 기막힌 건 15동 막사는 유대인 음악가들이 수용됐던 곳인데, 수용자들 앞에서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진지하게 연주하는 사진이 있었다. 그간 베를린 필하모니 등 화려한 유럽의 문화 또는 문명에 감탄을 마다하지 않다가, 그것이 도달한 지점이 결국 여기였는가 하는 생각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크라쿠프에서 프라하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이 철도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을 유대인들을 상상했다. 당시 프라하서 60km 떨어진 곳에 ‘테레친’ 수용소가 있었다. 이곳은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등지서 온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게토의 성격을 띤 마을 수용소였기에 수용자들이 가족단위로 머물러 많은 아이들도 함께 있었는데, 아우슈비츠에 자리가 나면 이 애들 역시 기차에 실려 갔다. 1942년부터 2년간, 여기 와있던 10살 전후 만 오천 명의 애들 중, 백 명만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멀쩡한 독일인들이 어떻게 이런 인종주의의 광기를 보였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그리 먼 얘기는 아니다.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애초 대금업, 금융업 등에 종사했고 거기서 부를 쌓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의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가 전쟁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물리적 폭력으로 전화한다. 심지어 나치는 소련과 전쟁을 벌이면서 유대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을 정당화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국 경제와 중국 민족주의에 대해 갖는 반감, 그리고 이와 겹쳐 조선족 같은 특정한 소수집단에 대해 갖는 부정적 태도, 성적 소수자들을 ‘빨갱이’로 저주하는 태도 등등은 인종주의의 다양한 변이형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