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박 100일의 여정
- 99박 100일의 여정
지난 3월 14일, 완도에서 배 타고 제주에 내려왔다. 3월 말이 공식 퇴사니 휴가 내고 3월은 직장인 신분으로 있었던 셈이다. 올레길 걸으며 틈틈이 일도 했다.
1월 말까지는 열심히 일했다. 스트레스도 제법 있었고. 그런데 더 그 상태로 계속 일했다가는 내 건강과 행복한 삶이 무너질 것 같았다. 2월 1일 퇴사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한 이후에는 주변정리와 인사로 한 달여를 보냈다. 그리고 뭔가로부터 벗어나 도망치듯 제주로 왔다.
무작정 걸었다. 올레길 한 바퀴 돌고 섬까지 다녀오니 한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미련도 원망도 다 사라지고 머리는 맑아졌다. 걸으며 많은 분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인생을 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올레길 완주 이후에는 한라산과 주변 오름을 올랐다. 성판악으로 백록담을, 영실로 윗세오름과 돈내코를, 곶자왈과 한라산 둘레길을 오르고 걸었다. 종아리 근육은 딴딴해졌으며 피부도 제법 탔다. 그게 좋았다.
제주에 머문 사이 전 직장 라인의 선후배들도 여럿 다녀갔고, 과친구들과 사회 선후배들도 나를 보기 위해 오기도 했다. 때론 올레길을 함께 걷기도 했고 올레길 걸으며 발견한 곳을 가기도 했다. 그들과의 술자리는 항상 흥겨웠고 좋았다. 단골집도 생겨서 갈 때마다 풍성하게 대접받았다. 매주 그 이름다운 방주교회를 다녔다. 모든 게 만족한 생활이었다.
와이프는 나를 이해하고 풀어줬다. 내가 이번 주 올라간다고 하니 ‘벌써’라며 놀라기도 했다. 첫 아이는 생애 첫 중2 중간고사 충격으로 스스로 학원도 다니고 제법 열심히 공부하고 둘째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잘 논다. 내가 다시 집에 가면 그 화목함이 깨질지도 모를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ㅎㅎ
그러다 성산의 지미봉에서 발목을 다쳤다. 다행히도 제주시 한라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을 잘 만나서 회복도 빨랐다. 깁스하고 숙소에 누워있다 보니 이제 이 여정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인가, 다시 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발목 부상은 단순히 ‘못 걷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강제적이지만 멈춰있으니 생각도 하게 되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다친 것도 복이다.
글도 쓰려고 제주 내려왔는데 제주에서 쓴 글은 ‘놀멍 쉬멍 올레길 걷기’ 40편뿐이다. 정작 ‘투자’ 관련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간다. 살짝 아쉽지만 돌아보면 너무나 만족스러운 제주 생활이라 이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글은 서울이 더 잘 써지기도 하니깐 말아다.
제주에서 책은 세권밖에 읽지 못했다. 그 대신 발목 다친 덕분에 넷플릭스는 실컷 봤다.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당초 목표로 했던 글도 못 썼지만 생각은 많이 했고 어떤 부분에선 생각의 정리도 많이 되었다. 인생, 성공, 일, 인간관계, 은퇴 후의 삶, 건강, 취미 등 많은 것들을 고민했고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게 제주에서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위미의 친구 집에서 닷새를 머물고 있다. 오늘이 이 집에서도 제주에서도 마지막 밤이다. 친구에게 저녁으로 돼지 두루치기를 해주고 위미항 방파재로 함께 산책을 나갔다. 서쪽으로 한라산 백록담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능선으로 해가 넘어가려고 한다. 구름도 이상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사그라드는 해와 더불어 한라산 너머로 아름다운 노을을 펼쳐 보인다. 장관이다.
날짜를 100일로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내일 떠나는 날까지 합하면 제주에서 100일이다. 내 언제 다시 이런 자유를 누려볼 수 있겠는가. 이젠 와이프 말마따나 애들 학원비 열심히 벌어야 된다. ㅎㅎ
제주살이는 한 달은 짧으며 석 달은 길다. 두 달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다리 다쳐 다시 못 간 추자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제주생활이었다. 심지어 모진 비바람까지도. ㅎㅎ
100일은 지나갔지만 난 또 다른 일탈을 꿈꿀 거다.
아디오스, 제주
2021.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