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트럭 마쿤키친카페
입대 전까지는 학부와 대학원 모두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었다. 어쩌다 보니 이십 대 초반에 입대할 타이밍을 놓쳤고 그 결과 스물여덟의 11월, 늦깎이 군인이 되고 말았다. 나이를 꽤나 먹고 군에 입대하게 된 거였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군생활을 못 견뎌하거나 어린 선임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지 나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 지인들도 무척이나 걱정을 하며 군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십 대 때의 종교인으로서의 경력 때문에 꿀보직(?) 중 하나인 사단 군종병으로 군생활을 하며 염려했던 만큼의 고생은 없었다. 또, 군대에서는 나이보다 계급이 먼저임에도 함께 했던 선임들은 나이 많은 후임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었고 그 덕분에 무사히 군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스물여덟 이등병이던 나는 국방부 시계와 함께 서른 살의 말년 병장이 되었고 전역 후에는 내가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에 복학해서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고 전도사로 일하다가 선교사로서의 삶을 사는 것, 그게 앞으로의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전역을 두 달 정도 앞두고 계획과 다른 전역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을 갑작스레 시작하게 되었다. 대다수 군장병 청년들도 전역 후의 삶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하겠지만 이십 대 초중반 청년들의 고민과는 조금 다른 무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십 대를 떠나보낸 서른 살의 말년 병장이었고, 1년간 교제 중이던 여자 친구와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창 하고 있었다. 처음 결혼 얘기를 주고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둘의 행복하고 단란한 일상을 그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전역일이 두 자릿수가 되고 결혼이라는 곧 마주 해야 할 현실이 다가오자 불안과 초조함도 함께 엄습하며 예상하지 못했던 전역 후의 삶을 고민하게 된 거다.
그동안의 나는 경제 개념이 없기도 했고, 변명일 수 있겠지만 봉사와 헌신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했기에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거나 저축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었다. 목사, 선교사가 되면 교회에서 거처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집을 사야 한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진 결혼을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는 인생 계획도 없었다. 그래서 100만 원 남짓하는 전도사 사례비(교회에서는 월급을 사례비라고 표현한다)로 나 혼자 생활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학자금도 갚아야 하고 우리 집은 가난한데. 눈 앞이 캄캄해지고 뒤늦게 여자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결혼, 할 수 있을까?
막막함에 취침 소등 후에도 한동안 잠 못 이루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고민을 이어가던 중 몇 가지 선택지를 두고 전역 후의 삶을 결정을 하기로 했다.
1.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며 전도사로 일한다. 월 60 ~ 100만 원 수입.
2.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한 임시 취업을 한다. 월 150 ~ 200만 원 수입.
3. 장사를 해서 경제적 기반을 닦으며 결혼을 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월 200 ~ 400만 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1번과 2번이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이었다. 1-2년 결혼을 늦추면 공부도 마무리하고 풀타임으로 교회 일을 하면서 사례비도 조금은 더 받을 수 있었다. 취업을 해서 잠시 다른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안정적으로 결혼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때의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사지방(군대의 PC방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푸드트럭 청년 창업자에게 1%대의 저금리로 4천만 원의 창업자금 지원(대출)을 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솔깃한 기사였다. 4천만 원이면 결혼도 할 수 있고, 창업을 해서 경제적 기반도 쌓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아무래도 푸드트럭으로 장사를 한다는 3번의 선택이 막막한 전역 후의 삶에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이며 최선의 선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자 친구와 상의도 해보고 몇 날 며칠을 더 고민한 뒤, 푸드트럭 청년 창업이라는 선택지로 마음을 굳히고야 말았다. 드디어 돌파구가 생긴 것 같아 한동안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망상을 시작했다. 열심히만 하면 결혼도 잘 치르고, 내 집도 장만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는...
그 순간 누군가 옆에서 ‘멍청아, 너 그거 망상이야. 헛짓거리 하지 말아.’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다시 선택지를 들여다봤을 텐데, 쳇.
소박하지만 아늑한 공간, 발걸음 한 손님들과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겨움을 쌓고,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면 정말 근사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삼십 평생 내가 실제로 만들어봤던 음식은 볶음밥과 김치찌개가 전부였다. 라면에 자신이 있었지만 양심상 그건 제외했다.
꿈에 부푼 나머지 메인 콘텐츠도 없고 진지한 준비도 없이 뜬구름만 잡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자칭 미식가에 손맛이 좋다고 자부하며 메뉴를 정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근자감은 사그러 들지 않았다. 오히려 쑥쑥 자라는 근자감과 함께 펼쳐진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는 이미 <심야식당>의 주인장이 되어 있었다. 백종원 씨의 <골목식당>이나 <푸드트럭> 방송이 조금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마음 가짐부터 다잡고 더 나은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왜일까.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본격적인 메뉴 선정을 위해 국내외 길거리 음식, 노량진 컵밥 거리, 이색 푸드, 기존 푸드트럭 등을 검색했다. 휴가 중에는 발품을 팔아가며 현장 조사도 다녔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어 졌고,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선 트럭 디자인도 매번 새단장을 했다.
몇 날 며칠을 메뉴와 트럭 디자인을 새로고침 하다가 이래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몇 가지 기준을 세우고 메뉴를 추리기로 했다.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조리와 재료 준비는 간편한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기꺼이 돈을 내고 사 먹을 수 있는 메뉴인지가 조건이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메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추릴 수 있게 됐고 그중에서도 팟타이, 핫도그, 컵밥이 탑 쓰리로 선정됐다. 그리고 최종 원픽은 이색적인 팟타이였다. 나머지는 평범하기도 했고 서브 메뉴로 두고 언제든지 종목 변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역하고 뭐해 먹고살지?’로 시작한 고민은
‘어떻게 푸드트럭을 시작하지?’로 바뀌었다.
취침 소등 후에 눈을 감고 푸드트럭에서 팟타이를 조리하는 나를 상상했다. 나는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채 손목에 스냅을 줘가며 팬을 들썩인다. 치익 치익 면과 야채가 볶아지는 팬에서는 맛있는 냄새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손님들은 트럭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내가 정성껏 요리한 음식을 환한 얼굴로 받아서 맛있게 먹는다. 나는 그런 손님들을 뿌듯해하며 팔짱을 끼고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다. 즐거운 소음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은은한 조명은 수고한 나의 흐르는 땀을 빛나게 한다. 캐시 박스에는 돈이 가득하다. 그리고 <심야식당>의 오프닝이 내 상상의 나래에 오버랩된다.
당시의 기억을 글로 옮기는 지금도 너무 근사해서 다시 푸드트럭이 하고 싶어 지는 마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상상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아마 그때의 난 그저 꿈을 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를 무렵,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곳을
‘마쿤키친카페’라고 부른다.
손님이 오냐고?
그게, 제법 온다오.”
유튜브 푸드트럭 창업수업
0교시 https://youtu.be/usNIaGcWBIs
1교시 https://youtu.be/oVhexa8Agh8
2교시 https://youtu.be/1Sts9SYiUyQ
3교시 https://youtu.be/Mpb97gPV03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