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평화하라
#인기 만화영화
그 무렵 석유파동(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 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 전쟁으로 비화됨으로써, 세계 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던 시기) 때문에 에너지 절약이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 방송은 TBC, MBC와 KBS가 있었는데(TBC는 나중에 KBS와 통폐합 된다) 그 때문에 아침 방송은 폐지되고 저녁 6시부터 정규 방송을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는 5시 반 무렵에 TV에서 무지개 바가 뜨면서 화면조정시간이 있었고, 그 후 6시가 되면 어린이 프로를 제일 먼저 했다. 그것도 한 시간 남짓. 물론 주말엔 이보다 4, 5시간 일찍 시작했고, 일요일엔 거의 온종일 방송을 했다.
어린이 인기 만화 프로로 <철인 28호>, <요괴인간>, <흰 사자 레오>, <우주소년 아톰>, <디즈니랜드> 등을 했는데 그게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다. <디즈니랜드>는 항상 만화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보여줬는데 만화는 왜 잘 안 보여주는지 그게 불만이었다. 도널드 덕이나 미키마우스는 워낙에 유명한 만화 캐릭터라 어쩌다 만화를 한다고 하면 그날은 정말 계 탄 날이었다.
항상 시작 때면 검은 콧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말끔한 초로의 월트 디즈니가 뭐라고 뭐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언니가 저 사람 벌써 죽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그럼 우리가 보는 저 초로의 신사는 허깨비란 말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축구왕>이라는 만화도 있었는데 만화의 인기와 더불어 처음으로 월드컵이 알려지고, 브라질의 유명한 축구 선수 펠레가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축구화가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남자 아이들은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행세를 못할 정도였다. 얌생이인 오빠가 이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사달라고 조르는 통에 아버지도 못 이기는 척 한 켤레 사 줬다. 장남이기도 했으니 어디 내놔도 꿀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걸 가지고 나와 동생 앞에서 어찌나 뻐기던지. 치사해서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오빠는 너무도 소중해 학교에서만 신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초기엔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또 알고 보면 <디즈니랜드>를 제외하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해서 좀 실망을 했다. 우리나라 만화 영화는 언제 나오는 걸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는 그런 걸 못 만드는 줄 알았다.
#가족
만화 영화를 너무 좋아한 탓일까? 워낙 오래된 영화라 내용이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앞서 말했던 <요괴인간>은 평소 땐 착한 인간이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요괴임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매회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착한 요괴라는 것. 그래서일까? 난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이 착한 건 잘 모르겠는데 요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요괸데 저렇게 인간의 탈을 쓰고 밥 먹고, 웃고 떠들며 나와 놀아주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어쩌다 저런 요괴의 무리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으니 저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가족들과 오래도록 같이 살면서 어렸을 때 나의 그런 생각이 전혀 틀리지마는 않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어쩌면 화를 낼 땐 괴물 같은지. 외부에 있는 괴물이라면 맞서 싸우든지 피하면 되지만 내부에 있는 괴물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다독거리며 평화 공존의 길을 수시로 모색해야 한다. 안 그러면 같이 망하는 수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데 거의 평생이 걸렸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