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옷가게를 시작한 후로 낮에는 옷을 파는 일을 하고 밤에는 동대문에 주문을 넣는 일을 했다.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이 옷과 관련된 일을 하는 시간으로 살아왔다.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오래전 그러니까 벌써 5~6년 전 서울 갔을 때의 일을 회상해본다.
혼자 서울 가서 밤새 동대문 상가를 쉴 겨를 없이 물건을 골랐다. 의류 상가들을 다 들르고 나면 시간은 이미 새벽 3시가 훌쩍 넘는다. 지방 중에서도 경상남도 김해는 서울에서 꽤 먼 곳이다. 새벽 5시에출발하는 장차를 타야 하기에 시간은 겨우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서울과 제법 먼 곳에 사는 이유로 동대문시장까지 물건을 사러 가는 일은 큰 행사였다. 왕복 이동시간만 꼬박 10시간이 걸린다.
옷을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추어 구매하고 나면 신발을 구매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청계천 옆의 오래된 낡은 상가였다. 상가 밀집지역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신발 상가는 새벽 두 시에 오픈했다. 컴컴한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래전 서울로 가족여행 갔을 때 보았던 청계천은 예쁘게 조명을 밝혀 놓고 길거리 공연이나 문화행사 등을 하면서 공원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었지만 신발상가로 가는 청계천은 그냥 개천이었다. 물론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화려한 불빛은 아니지만 다리 위로 조명은 밝혀져 있으며 청계천을 비추고 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 다리를 건너다가 개천을 바라보며 잠시 숨 고르기를 할 때도 있었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청계천을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으면 먹먹해지기도 하면서 짧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아. 이제 오늘을 마무리하는구나.’
'밤새도록 수고 많았어.'
내가 나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주는 곳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복잡하고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상가지역을 빠져나와 조용한 청계천에 도착하면 마음이 차악 가라앉는 것을 여러 번 느끼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시간에 쫓길 때는 이렇게 단 몇 분의 여유도 찾을 수 없기도 했다. 2주에 한 번씩 이런 행사를 치르지만 마칠 시간이 다가오면 늘 큰 과제를 해결한 듯이 뿌듯했다.
청계천 다리 건너에 있는 낡은 신발상가는 앞에 들렀던 상가보다 단가가 2000원 정도는 싸다고 했다. 하지만 신발상가의 오픈 시간은 새벽 2시였으며 공장에서는 새벽에 물건이 나왔다. 몇 가지를 고르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시간이 새벽 4시가 되었다. 전날 저녁 8시 30분쯤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여 새벽 4시가 된 것이다. 시간이 새벽이 되면 사입 삼촌들은 쌓여있는 우리들의 물건을 화물차에 싣기 위해 포장작업을 시작한다. 새벽 3시가 지나면 청계천 쪽 상가까지는 사입 삼촌들이 올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그것을 들고 가야 했다. 재고가 없는 경우는 버스 탑승 시간 때문에 신발을 제때 챙겨가지 못하고 화물비를 지불하고 다음날로 하루를 미루어 물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발상가를 들르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갔으며 다시 돌아갈 길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밤새 돌아다니느라 발도 아프고 다리도 무겁고 지쳐서 발이 질질 끌렸다. 한 켤레 2000원이면 열 켤레면 2만 원이나 절약되기에 초반 몇 년은 열심히 청계천까지 다녔다.
신발은 대부분 박스에 들어있어서 부피가 꽤 컸다. 그것을 열 박스만 사더라도 부피 때문에 들고 가기가 불편했다. 각이 잡힌 신발 상자가 자꾸만 다리를 때려서 아팠다. 그리고 신발은 가죽이거나 바닥은 생고무 같은 재질이라서 무게가 제법 나갔다.
그날은 신발을 좀 많이 샀던 날이었고 대부분이 박스에 들어있는 신발이어서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낑낑거리면서 들고 가다가 도저히 들 힘이 없어서 비닐봉지에 담긴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고 갔다. 그러다가 길이 안 좋으면 다시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들고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질질 끌고 갔다.
버스 탑승시간은 임박하고 정신없이 신발 봉투를 끌고 지나가는데 상가 앞에 잡화를 파는 가게 아저씨들이 길에 서 있다가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막 불렀다.
"아줌마!!" "사장님!!"
잠도 오고 지치기도 해서 멍하게 걸어가고 있었기에 나를 부르는 것인 줄 도 몰랐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크게 불러서 돌아보았더니 끌고 가던 비닐봉지가 밑바닥이 찢어져서 신발 상자를 하나씩 흘리면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이 되어 정신은 비몽사몽 몸은 지쳐서 박스가 새는 것도 모르고 버스시간을 맞추느라 급히 앞만 보고 걸었던 것이다. 그 아저씨들이 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정말 무슨 개그프로에서 ‘웃프다’(웃긴데 슬픈 장면이거나 슬픈 장면인데 웃음이 나오는 상황.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런 상태)고 표현하는 한 장면처럼 신발은 다 흘리고 비닐봉지에 신발 박스 한 두 개만 남아있는 그런 상황을 연출할 뻔했다.
시간은 촉박하고 신발은 길거리에 한 박스씩 흘리고 왔다면 눈물 날 것 같은 이야기다. 다행히 두세 박스만 흘렸고 마침 가게 앞을 지날 때여서 아저씨는 커다란 대봉을 들고 나오셔서 길에 흘린 신발도 주워서 새 봉투에 다시 넣어주셨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일이었는데 아저씨 눈에는 작은 여자가 신발 박스를 담은 커다란 봉투를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 것 같았다. 진심으로 눈물 나게 고마웠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시간 때문에 음료수 한 병 사드리지 못하고 길을 재촉했다. 그 날의 고마움을 잊을 내가 아니다. 그다음 서울을 갔을 때 음료수를 사들고 신발상가를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서 감사했다는 인사를 했다.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들이 많고 이기적이고 차가운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동대문에서 만났던 연세가 좀 많아 보이는 상인 아저씨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체구가 작은 여자들에게는 친절한 것 같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것도 나의 인덕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따뜻한 경험 때문에 동대문이 무서운 곳은 아니었다.
이후 나는 신발까지 들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청계천 신발 상가를 포기했다. 신발 전문점도 아니고 좀 작게 남기고 몸을 편하게 해야 했다. 청계천 상가 대신 의류상가에 입점해있는 신발매장에서 편하게 고르고 배달까지 받았다. 단가 2,000이 비싼 이유는 내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몸 버려가면서 아낄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사입 삼촌’들도 청계천 신발상가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했으며 택배로 물건을 받으라고 했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으며 힘든 와중에도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었다. 화물비 3,000원을 우습게 여기지 못하는 것도 역시 배운 것 중의 하나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또는
‘티끌은 모아도 티끌이다.’이런 말들이 있지만,
남의 눈에 티끌로 보이는 것들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결코 티끌이 아닌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간혹 손님들 중에도 이미 할인을 해서 꼭 받아야 하는 금액을 말해도 뒷자리 몇 천 원을 마저 깎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럴 때는 정말 마음이 힘들다. 장사는 이런 2~3천 원이 모여서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그것을 깎자고 하니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화물비 3000원과 청계천 상가까지 2000원을 아끼려고 걸어가면서 고생한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단돈 2~3천 원을 너무 쉽게 깎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왕복 10시간의 먼 서울에서 밤새 잠 안 자고 발품을 팔아서 고른 물건들이다. 다른 것에서 일이천 원 아끼더라도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는 그런 금액으로 원가 운운하면서 힘든 구멍가게 사장님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정말 '장사꾼'들은 이윤을 잘 남기면서 장사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변에서 보아온 동네 작은 옷가게 사장님들은 그런 장사꾼은 아니었다.
세상에 많은 직업이 있지만 내가 하는 분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시야가 좁은 사람이었고 당장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평소에 다방면으로 다양하게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했다.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도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기고 알아야 할 일이 생기면 닥쳤을 때 그때 알아보는 성격이기도 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그것도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장사를 할 것이라곤 단 한 번도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더욱더 생소했다.
그리고 나는 참 용감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으니 걱정도 덜했는지 모른다. 동대문은 힘들고 때론 신나고 즐거운 곳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신발 상자 흘리면서 새벽길을 걷는 것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엄두도 못 낸다. 밤새 몇 백만 원어치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고르고 사는 일인데 어찌 즐겁지 않을까? 물론 힘도 들었지만 늘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고르며 새 옷을 입는 생각으로 눈을 반짝거리면서 동대문을 활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