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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Sep 25. 2021

안녕, 내 자랑스러운 소녀야

올해 초에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연락이 끊긴 또 다른 한 친구와 함께 우리 셋은 중학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셋 다 성적도 비슷했고 성격도 닮은 점이 많아서 사회성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 녀석들은 고맙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앞다투어 열심히 공부했고 학원에도 같이 다녔다. 쉬는 날이면 우리는 밤을 새서 같이 만화책을 읽고 유행하는 팝송 가사를 외우고 '죽은 시인의 사회'같은 오래된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내 중학교 시절은 온통 우리 셋이서 함께한 기억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근 20년만에 연락이 닿은 샘이다. 건너건너 친구들을 통해 간간히 이 녀석 소식을 전해 들을 기회가 있어서 대학은 어디를 나왔는지, 졸업 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몇 가지 소식은 업데이트가 되어 있었다. 듣지 않아도 될 녀석의 파란만장한 연애사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녀는 위풍당당한 욕심쟁이 꼬마대장같은 이미지였다. 듣자 하니 커서도 그런 다부진 성격은 여전한 것 같아 나는 녀석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것이 있다는 것과 내가 잘 아는 익숙한 대상이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일 거라는 상상은 은밀한 안도감을 들게 했다. 나는 시간이 낳은 그리움의 공백을 그 시절의 우리와 나를 추억하는 일로 메꾸곤 했다.



그렇게 혼자 녀석을 보고 싶어하다가 몇 번 용기를 내어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짧은 대화를 주고 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 사는 도시가 달랐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녀석에게 연락을 해 만날 약속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안녕, 나 이번에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는데, 우리 시간 맞으면 밥 먹자. 너 언제 시간 되? 바쁘면 간단하게 커피한잔 해도 되. 스케줄 보고 연락 줘.' 녀석은 번번히 나와 일정이 맞지 않았고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했다. 서울살이가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다던데 과연 그런가 보다고 이해했지만 한편으론 녀석이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줄 알고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도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몇 마디 주고 받았다. 그녀는 넌지시 모바일 청첩장을 내밀며 결혼소식을 전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서른 중반의 결혼 적령기 여자가 갑자기 옛 친구를 찾을 이유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결혼을 준비할 때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경험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기대한 마음이 컸던 탓에 한순간 괘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그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울적했다. 밉기는 해도 축의금은 보내줘야 하나 싶어 고민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 축하를 받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한참 전에 미리 연락을 줬어야 하지 않을까. 녀석은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결혼식 하객석의 빈 자리를 채워줄 누군가가, 아무나 필요했을 것이다. 옹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도 그녀만큼 많이 변했고 그건 누구에게나 아쉽고 쓸쓸하지만 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유년시절의 나는 친구들에 비해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력이 워낙 안좋았기 때문에 몸과 뇌의 협응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아 운동은 반에서 늘 꼴등이었다. 나는 체육시간이 언제나 두려웠고 피할수만 있다면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교실에서 아픈 환자 역할을 했다. 피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치 내가 무대 위에 광대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아오는 공을 잡고 피하고 또 그 공을 다른 친구에게 전달해주는 모든 신경반사적인 움직임이 내게는 너무 버거웠고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공이 너무 무서워서 죽을 힘을 다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보면 나는 줄곧 맨 마지막에 세트 안에 남아있는 사람이 되곤 했다. 나 한 명을 맞추고 무너뜨리면 상대편이 이기는 찰나, 나는 공을 든 상대편 친구의 높이 쳐든 손이 공포스러워 잔뜩 몸을 웅크렸다. 나는 체육시간이 끝나면 늘 인생의 절반쯤 오늘도 실패한 것 같다는 패배감에 짓눌려 걷잡을 수 없이 의기소침해졌다.



시력의 제약은 몸을 쓰는 일에 관해서 일상의 사소한 거의 모든 부분을 통제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친구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는 일, 수업 중 선생님이 하는 판서를 공책에 옮기는 일, 교과서의 글씨를 소리내어 읽는 일, 시험지에 인쇄된 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리부도에 적힌 좁쌀같이 작은 글씨의 지명 특산물을 외우는 일, 리트머스종이의 색이 변하는 것을 알아채는 일, 선생님의 심부름을 실수없이 해내는 일…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눈을 감고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라. 눈을 뜬 채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이 눈을 감으면 갑자기 불가능한 일들이 된다. 물론 나는 저시력자이기때문에 완전히 앞을 못 보는 경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이 다행인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정상인에 비해 많은 것들이 불편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교실에서 내 자리가 언제나 지정석이라는 것이었다. 내 키가 반에서 작든 크든, 랜덤으로 자리뽑기 게임을 하든, 성적 순으로 좌석배치를 하든지 내 자리는 언제나 교실 맨 앞자리 첫 줄 한가운데, 교탁 바로 앞이었다. 선생님이 강제로 그렇게 정해준 것은 아니었다. 학기초에 각자 선생님에게 원하는 희망사항을 적어내는 쪽지에 나는 늘 눈이 나쁘니 교실 맨 앞자리에 앉혀 달라고 적어냈다. 내가 나를 속박한 것이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아무리 싫어도 탓할 대상이 없었다. 그렇게 싫으면 다른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나에게 좌석배치는 생존의 문제였다.



교실 맨 앞자리 정중앙에 앉아도 칠판의 판서가 잘 보이지 않는 일은 허다했다. 지금에야 스마트기기를 활용한 수업이 보편적이어서 판서에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학업에 큰 지장이 없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각 교과목 마다 필기공책이 한권씩 따로 있었고 그 공책에다가 선생님의 판서를 받아적고 예쁘게 정리하는 것이 점수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많은 선생님들이 칠판 전체를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히 판서하시고 그도 모자랄 경우엔 숨어있던 모눈종이 무늬의 서브칠판까지 꺼내서 판서를 이어갔다. 선생님의 글씨들은 내 기준에 너무 작았고 맨 앞자리에 앉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때문에 나는 방과후에 친구들에게 빌린 교과노트를 집에 와서 베껴 적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맨 앞자리가 맨 뒷자리보다는 나았다. 앞자리에 앉으면 글자들의 희미한 윤곽이라던가 판서 내용을 가리키는 선생님의 손짓을 대충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않고 포기부터 배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맨 앞자리의 절망과 맨 뒷자리의 절망은 어차피 절망이라는 점에서 똑같아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조금이라도 덜한 쪽의 절망을 택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 법이다. 희망고문같아 보여도 그게 나의 생존전략이었고 나를 다독거리고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내 노트에 뻥뻥 뚫린 빈칸이나 엉터리로 필기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나면 벌써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수업 중 판서가 특히 많은 날에는 선생님몰래 공책에 무엇인가 열심히 필기하는 척을 하기도 했다. 다들 숨죽이고 펜을 샥샥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한 교실에서 나만 손 놓고 멀뚱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혼낼 것만 같아서 나는 교과서를 보고 무엇이든 그럴듯한 말을 옮겨 적으며 짐짓 모든 것이 잘 보이노라, 나는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를 하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노라 연기를 했다. 친구의 노트를 하루동안 빌릴 수 없는 날에는 집에 가기 전에 복사집에 들러 오늘 판서한 부분만이라도 복사할 수 있냐고 부탁을 했다. 청소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면 나는 친구들에게 공책빌리기를 시작했다. '저기 미안한데 오늘 노트 좀 빌려줄 수 있어? 내가 눈이 나빠서… 판서가 잘 안보여서 그래. 내일 아침에 꼭 돌려 줄게.'와 비슷한 말을 매일 조금씩 바꾸어 가면서 했다. 이 때 유의할 것은 똑같은 이유로 공책을 빌리는 것에 식상함을 주지 않을 것, 너무 비굴하다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을 것, 또 반대로 부탁하는 주제에 염치없이 당당해 보이지도 말 것이었다. 나는 겨우 열다섯 남짓한 어린 소녀였고 이 일련의 과정은 아무리 반복해도 늘 할 때마다 어색하고 어렵기만 했다. 나는 말라 비틀어진 용기를 쥐어짜고, 심호흡을 하고, 기합을 넘으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려고 노력했다.



딱히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자신있었던 것은 공부였다. 공부는 내가 노력하면 노력한대로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친구들보다 내가 더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절박하게 공부했다. 나는 처절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시력이 나빠서 남들보다 두세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시험 기간이 되면 나는 교과서의 문장들을 통째로 암기하는데 집중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쉼표 하나까지도 동그라미를 치며 외울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지독했다 싶을 정도였다. 그 시절 친구들은 나를 '늘 공부하는 아이', '책상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 '눈 나쁜데 공부잘하는 아이'로 불렀다. 사실 모범생같은 갑갑한 이미지가 싫었지만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타이틀이 그것 뿐이었다. 나는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여러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사람, 공부는 못하지만 유머러스하고 왠지 모르게 늘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 걱정없이 편안한 얼굴로 입가에 웃음이 늘 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부같은 건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나는 행복한 멍청이같은 애가 되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20년 전 책가방의 무게만으로도 세상이 버거웠던 그 때로부터 지금의 나는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수록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일들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경쟁을 하고 시험을 통과하고 순위권에 들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 학생의 역할은 나같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고단하고 괴로운 배역이었다. 직업을 가지게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서서히 학생이라는 단역에서 벗어나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공부 말고도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책 한 줄 제대로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돈도 벌어야 하고 적당히 인맥도 관리해야 하고 부모님도 챙겨야 한다.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역할도 공백없이 잘 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나를 속박하지는 않는다. 모두 다 내가 원하고 선택한 일의 결과이니 힘은 들지만 성취감도 크다.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주는 것은 그저 조금 더 성실하고 건강하면 되는 것이니 겁낼 일도 아니라서 좋다. 비교와 경쟁의 프레임속에서 더 이상 나를 옥죄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그러나 온통 암흑뿐일거라 생각했던 내 유년기의 그림자속에서도 그리운 것이 있다.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반짝이며 꺼질 듯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는 심장박동소리, 쿵쾅거리는 가슴속에 요동치던 꿈들,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던 무수히 많은 밤들, 터질 듯한 분노도 사랑도 미움도 모두 다 녹아있던 오래된 일기장의 낙서들, 그런 것들을 추억하며 안타까워하는 시간이 잦아진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타 들어간다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는데, 나는 그 뜨거운 불길의 온기로 언 마음을 녹이고 따뜻한 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의 내가 가진 부드러움, 유함, 탄력성은 모두 그 뜨거웠던 불로부터 담금질하여 얻어낸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미완성의 도자기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다듬어지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심야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던 나, 운동장에서 뛰노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혼자만 아는 노래가사를 읇조리던 나, 기 죽지 않으려고 두 눈을 잔뜩 부릅뜨고 걷던 나, 자주 넘어져서 무릎이 성할 날이 없던 나, 도서관에 숨어 서가에 꽂힌 먼지 쌓인 책들의 책등을 하릴없이 문지르던 나. 흐릿해진 기억속에 무수히 많은 파편들로 흩어진 어린 소녀의 흔적을 긁어 모은다. 그 소녀에게 이 글을 빌어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사실은 내가 널 많이 좋아했다고, 미안했다고,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고. 네가 있었기에 내가 살 수 있었다고.


너무 오래 아파하지 마렴.

나는 네가 언제나 행복하기만을 바래.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게.

힘내, 내 작은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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