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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Sep 22. 2021

마음에 비친 눈동자

나는 시선에 민감하다. 민감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누군가 무심코 내 쪽으로 우연히 눈길을 돌렸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덮어놓고 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필요이상으로 날이 선채로 나는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을 평가한다. 객관적인 자기검열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만은 내 경우에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방어기재의 하나로 작용하는 안 좋은 습관이라는 편이 맞겠다.


'대체 왜 쳐다보는 거야? 내가 이상한가? 그렇게 힐끔거리지 말고 차라리 말을 해. 뭐가 마음에 안드는 거야? 그래,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그래도 도둑놈처럼 남을 훔쳐 보는건 예의 없는 거잖아. 내가 빤히 쳐다보면 당신은 기분이 어떨 것 같아? 한번 생각을 해봐. 지금 내가 얼마나 기분 나쁠지 말이야.'


일단 타인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하면 마음은 타는 양은냄비처럼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끓어 오른다. 몸 속 저 깊은 단전 어딘가에서 주체하기 힘든 화가 훅 하고 솟구치는 기분이다. 순한 맛 말고 청양고추 다섯 개쯤 썰어 넣은 독한 버전의 라면 냄비처럼 말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 잡아 보아도 늘 그 놈의 '시선'은 허락없이 나를 꿀꺽 집어 삼킨다. 객관적인 상황판단, 자기 인식, 평정, 이해와 포용, 유머 같은 것들은 이런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굴에는 심술이 덕지덕지 올라와 입은 불뚝 튀어나오고 눈꼬리는 사나워진다.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사춘기 소년처럼 모나고 가시가 잔뜩 돋친 모양새다. 왜곡되고 비논리적이며 고집불통에다 온갖 자격지심으로 겹겹이 무장한 구제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온 몸에 털을 곤두세우고 두 눈을 흘기며 여차하면 무엇이든 할켜버릴 태세로 주위를 살피는 앙칼진 고양이다. 잔망스러운 동그라미 눈망울로 꼬리를 살랑거리며 발발대는 명랑한 강아지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 살아온 습성은 아쉽게도 어둡고 구석진 자리를 맴도는 음침한 길고양이과다. 사랑만 듬뿍 받고 자라서 어디 한 군데 모난 구석 없이 행복한 댕댕이 같은 사람이고 싶은 것은 언제나 내 희망사항이다. 균형있고 예쁘게 각진 다면체같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제멋대로 뻗친 털 뭉치를 뒤집어 쓰고 하릴없이 주위를 살핀다. 한 놈만 걸려봐라. 그 때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를 이러저리 물고 뜯고 할퀴다가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으면 스스로를 상처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겨우 차리는 아둔한 녀석, 그가 바로 나이다.


대체 왜 저 이의 마음이 이만치도 삐뚤어 졌나 궁금해 할 분들을 위해 몇 가지 고백을 한다.


<고백 1> : 나는 '척'하는 것에 익숙하다.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별 일 없는 척, 각종 척척척을 하면서 살다 보니 이제는 피노키오처럼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하는 모든 '척'에는 '이 모습 그대로 나 인 것을 어쩌겠냐'는 식의 자포자기와 모자라면 모자란 데로 좋다는 자기암시가 얼마쯤 섞여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약간의 자아도취와 다분한 정신승리가 합쳐진 결과로 나는 때때로 긍정을 가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고백 2> : 사실 나는 괜찮지 않다. 나는 모순적이고 제멋대로식의 화를 표출 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감정조절에 미숙한 것은 실은 내가 괜찮지 않기 때문이다. 남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이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정말 괜찮은가 스스로 착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스스로 편하지 않은 것이 남들 눈에 자연스러워 보일 리 없다. 자기방어적인 나의 '척'들은 자주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색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억지로 웃어 주느라 살짝 경련이 인 입가를 보면 내가 뭘 또 실수했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나이만 숫자로 하나 둘 늘었지 부끄러운 유아기적 기질이 내 몸 어딘가에 뿌리가 박혀 성장을 멈추었다. 후회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하고 반성하는 일들이 아직까지도 너무 잦은 걸 보면 그것도 아주 깊숙이 뿌리가 박힌 듯 하다.


 '그 때 왜 그런 거야? 그냥 솔직하게 행동하면 되잖아. 사실대로 얘기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거야. 그냥 괜찮지 않다고 말해. 기분 나쁘다고, 편하지 않다고,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좀 시간이 필요하다고. 혹은 때때로 화가 나고 슬프다고말야. 뭐가 됬든 솔직하게 그냥 말해. 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넌 그냥 자신이 없는 거구나. 맞지? 사실 마음에 안 드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야. 그래 그거였어. 내가 내 스스로를 괴롭히고 침해하고 깎아내리는 거지. 네 생각만큼 남들은 너한테 관심이 없어. 그냥 쳐다보는 거라고. 아무 이유가 없어. 하필 우연히 그 순간에 너랑 눈이 마주친 거야. 그 뿐이야.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마. 넌 항상 생각이 지나치게 많고, 또 대부분이 쓸데없는 망상이라는게 문제야. 남들은 죄다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거, 혹시 나르시즘이니? 그럼 넌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구나. 널 알아봐 주고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거야.'


'남들 평가가 무슨 소용이야. 네가 삐뚤어진 눈으로 널 보니까 남들도 너처럼 삐뚤어 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거잖아. 생각하는 만큼 보이는게 세상 이치라더라. 네가 여유로워지면 남들도 널 너그럽게 봐. 쓸데 없는 것에 제발 신경 꺼. 알게 뭐야. 어차피 너도 남들 사는 일에 그다지 관심없잖아. 그냥 생긴대로 살자, 응? 태어난 대로, 부모님이 훌륭하게 낳아주신 모습 그대로, 훼손하지 말고 그대로 잘 보존하면서 아껴주고 살아.'


몇 번이고 풀어서 정답을 수도 없이 외웠지만 기어코 다시 지겹도록 회귀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독백이다. 그래서 고백이지 않을까. 고백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다. 비밀스럽다는 것은 떳떳하지 않고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거다. 노력해도 잘 되지 않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쓰지 못하는 부분, 그런 못난 면면을 수줍게 꺼내놓는다. 특히 글로 써내려 가는 이런 고백은 의미가 크다. 몇 번이고 생각을 가다듬고 말을 고르기 때문에 말로 할 때에 비해 진실성에 무게가 훨씬 더 실리는 것 같다. 진실성을 회복하는 것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마음을 숨기고 위장하는 것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한번 생체기가 난 마음은 반드시 풀어서 바깥으로 꺼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처가 덧나지 않고 흉터도 짙게 남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어린애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결혼한 지 2년을 넘긴 해의 어느 날이었다. 시댁식구들과 아직 서먹하고 서로 모르는 것이 많을 때였다. 집안 어른들이 집에 다녀간 날이면 남편과 나는 어김없이 작은 말다툼을 벌였다. 각자 살아온 서로의 가정환경을 잘 몰랐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서운함이 쌓인 탓이었다. 사소한 말과 행동이 확대해석되고 그래서 전혀 싸울 문제가 아닌데도 급기야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는 식의 유치한 말장난으로 번지는 양상이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하루를 묵으시던 날이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 때는 살림에 대해서 정말 하나도 모를 때였다. 당연히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시어머니께 예쁨받고 싶어서 이래저래 긴장이 많이 되었다. 야무지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몸과 마음이 서로를 배반하며 삐걱거렸다. 어머니께서는 그날따라 유독 나를 유심히 보시는 눈치였다. 종일 온몸에 달아오르는 열기를 누르느라 진땀을 뺐다. 아마 아들 내외가 밥은 잘 먹는지 반찬은 뭘 해먹지 살림살이는 괜찮은지 궁금한 게 이래저래 많으셨으리라. 내 손끝, 칼끝, 행동거지를 조용히 살피고 응시하는 어머니를 짐짓 모른 척 했지만 실은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폭발하는 긴장에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던 나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손에 한껏 심을 주어 행주로 테이블을 훔쳤다.


저녁에 남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아니 그보단 적어도 어딘가 맘에 안드시는 눈치이니 당신이 혹시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기에 어머니꼐서 온종일 나를 관찰하시더라고 했다. 음식준비하는 모습이며 밥을 먹고 물건을 챙기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소한 행동거지들을 유심히 보시더라고.


"글쎄, 그건 아닐 거야. 너도 알잖아. 우리 엄만 그렇게 사람을 빤히 관찰하실 분이 아니야. 그래고 네가 맘에 안들게 뭐가 있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걱정하지 마. 그냥 네가 오해한 거야."


남편의 반응은 간결했고 그래서 심드렁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순간 풀이 꺾인 나는 꺼져버린 성냥개비마냥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사건은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서 터지고 말았다. 남편이 불쑥 시어머니께 어젯밤 내가 한 말을 일러 바친 것이다. 더하거나 덜 하지 않고 내가 말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어머니께 옮겨 말하는 남편을 상상해보라. 정말 경악할 일이었다.


"엄마, 지예가 눈이 나쁘잖아.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걸 부담스러워 해. 엄마가 어제 지예를 유심히 관찰해서 지예가 많이 힘들었다더라고. 엄마가 지예를 싫어하거나 못 마땅해 하는 건 전혀 아니잖아, 그치? 엄만 별 뜻없이 그냥 쳐다보는 건데 지예는 그런 게 좀 어려운가봐."


남편의 돌방행동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 눈물이 핑 돌지경이었다. '이 사람이 미쳤나. 그걸 어머니께 직접 말씀 드리면 어떡하냐고. 내 입장은 뭐가 되고. 어머니께서 나를 얼마나 옹졸하게 보시겠어. 앞에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뒤에선 남편에게 뒷말을 하는 못난 며느리라고 생각하시겠지. 망했다, 난 몰라.' 짧은 찰나에 영원같은 시간이 흐르는 듯 했다. 차라리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것은 나뿐 만이 아니었다. 시어머니께서도 난데없는 아들의 돌직구에 적잖이 당황을 하신 눈치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어머니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여신 것은 시어미니였다. 어머니가 그 때 하셨던 말을 정확히 옮겨 적을 수 있다면, 그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말들을 모든 이와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충 기억나는 바로 어머니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지예야, 미안해. 내가 원래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어. 내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잖니. 손님들을 만나고 응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게 되더라. 잘 들으려고 말이야. 나이가 드니까 잘 안들리기도 하고 해서… 빤히 쳐다보고 저 손님이 뭘 원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그게 몸에 베여서 그런거야. 내가 널 일부러 관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란다. 미안하다, 지예야. 오해하지 마렴."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울음을 터뜨렸던 것 같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울면서 무슨 말들을 지껄였을까. 그 뒤의 기억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꽤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또렷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때 굉장히 부끄러웠다는 사실이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종류의 부끄러움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부끄러움앞에 나는 벌거벗은 태초의 인간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겸허히 죄를 고백하고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짐승 한 마리를 상상해 보라. 진심을 가득 담아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이 어지신 분을 오해했다는 것에 대한 죄송함이 물보라 치듯 나를 덮쳤다. 나라는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상태로 베베 꼬였구나 싶어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온 몸에 흐르던 긴장이 탁 끊겨 나갔다.


그 후엔 텅 빈 고요와 평화가 서서히 밀려왔다. 폭풍우가 물러간 뒤 다시 잔잔해진 바다같이 마음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어머니가 다녀가신 이후 나는 천천히 치유되었다. 오직 나만이 자각할 수 있는 미묘한 변화들이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를테면 화내기 전에 한 번 더 질문하고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거나 심호흡을 크게 두세번 하는 것들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은 재미있었고 심호흡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통제감을 몸에 익히는 것이 뿌듯했다. 한 두번 긍정을 옷을 입고 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미래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자유롭고 긍정적인 사람, 무엇보다 감정의 흐름에 왜곡이 없는 사람이 되어 보자.'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동안 남들 신경쓰느라 내가 나를 챙기지 못했으니 더 이상 내 마음이 섭섭하지 않게 충실히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리라 계획을 세웠다. 우선 명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여행길에서 체험한 명상수업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 체계적으로 명상을 공부해보기로 했다. 또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시간에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책도 읽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기도 한다. 차 한잔을 홀짝거리며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씨름하는 순간이 행복하다.


명상에 관한 책을 읽다가 멋진 구절을 발견했다. '행복은 마음의 초기 상태다. 행복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는 것이다. 행복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란 사실, 이런 깨달음은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나는 이 구절을 독서노트에 옮겨 적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안의 행복은 그간 참 힘들었겠구나. 한번도 제대로 행복을 반갑게 맞이해 준 적도 대접해 준 적도 마음껏 쉬라고 자리를 마련해 준적도 없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내 속에서 이리도 홀대받던 행복이 그래도 아직 살아남아 오늘 하루를 감사로 채워준다. 전쟁같은 하루가 무사히 잘 지나갔다. 미안하고 고맙고 또 황송한 마음에 뭉클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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