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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민 Jun 30. 2020

주어진 26일

N부터 Z까지



주어진 27일의 기록에서는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었다. 이제 남은 제목들,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나의 추한 모습, 인정하기 싫은 부분, 나만 아는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N부터 Z까지 이야기해보겠다.


비가 쏟아져도 우산 없이 견딜 수 있다. 배가 고파도 끝끝내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재미없고 관심 없는 주제로 대화를 나눠도 열심히 듣고 있을 수 있다. 집중은 잘 못해도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 있다. 주어진 공간에서 나름대로 차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적당히 먼 거리도 걸어갈 수 있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곧잘 들어갈 수 있다. 새벽까지 안 자고 즐길 수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여행의 끝이 아쉽고 추억을 더 이어가고 싶은 날이면 몰라도 절대 사서 고생하진 않는다. 아무리 심심해도 견딜 수 있다. 결과가 있는 것이라면 기다릴 수 있고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길 바라면서 과정을 견딘다. 누군가와 함께 추억이 될만한 이벤트가 있고 그걸 촬영해 두었다면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멋진 사진이나 영상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힘든 줄 모르고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받은 이의 너무 좋다는 말 한마디에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이런 번거로움쯤은 견딜 수 있다. 일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하는 편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고민을 많이 하는데, 동료가 느리더라도 꾸준히 잘 해낸다면 기다릴 수 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고 싶은 TV프로가 있어도 다른 걸 봐도 괜찮다. 음식점에서 음식이 제법 늦게 나와도 견딜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 시간에 맞게 출발하거나 넉넉하게 시간 잡고 출발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늦는다면 견딜 순 있지만 속상하다. 목이 말라도 견딜 수 있다. 술 한 모금 없이도 술자리에서 견딜 수 있다. 


찬바람, 찬 공기를 좋아하지만 오래 맞지 못한다. 목이 약해서 쉽게 부어오르는데 목이 부었다 하면 기침이 나고 열이 나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다. 설거지가 쌓여있는 걸 견딜 수 없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이동할 때 차가 막히는 걸 견딜 수 없다. 안 막힐 시간에 골라서 미리 출발하는 게 백번 낫다.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 있는데 내 수중에 카메라가 없을 때 몹시 견딜 수 없다. 모기가 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가끔 일 때문에 체류하는 호텔에서 잠을 자다가 건조해서 피부가 찢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견뎌내는 것이 쉽지 않다.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져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자려고 시도하는데 끝끝내 잠들지 않고 누워있을 때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다. 책 내용이 결말까지 거의 다 왔을 무렵부터 새로운 책을 읽고 싶어 진다. 더운 걸 참을 수 없다. 그렇다고 추운 것도 못 참는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다 하기 싫어진다. 어색한 걸 견딜 수 없다. 실수가 반복되는 걸 못 참는다.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견딜 수 없다. 매너 없는 태도를 마주하면 견딜 수 없다. 직감에 따른 행동이 먼저지 설명서를 보고 천천히 익히는 걸 못 견딘다. 다른 건 몰라도 새 제품의 기계를 주문하면 올 때까지 기다리기 힘들다. 


생각보다 치사하고 쪼잔하다.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는 그렇지 않지만, 혼자 밥 한 끼를 사 먹어도 가격을 생각한다. 밥이 문제가 아니다. 혼자 있을 땐 카페에 가고 싶어도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또 자제한다. 부족하게 자라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씀씀이가 크지도 않다. 스스로에게 피곤한 타입이다. 옷도 잘 못 입으면서 가지고 있는 옷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적당히 멋 낼 수 있을 만큼만 마음 편히 소비하는 것도 좋은데. 내 기준에 정말 친하거나 좋아하는 친구일 경우 계산 없이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친구일 경우는 쪼잔하게도 정확하게 계산하려 한다. 겉으로 티는 안나도 머릿속에선 이미 계산 중이다. 이런 내가 밉다. 내가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레 겁부터 나고 위험하다며 논리적이지도 않게 반대만 한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말을 골라서 한다. 솔직한 편이라고 얘기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명확하겐 알 수 없는 괴리감을 스스로에게 느낀다. 좋은 리스너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쩔 수 없는 자리가 아니면 딱히 먼저 나서서 들어주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기 싫어한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는 희한한 관종이다. 부러울만한, 배울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실제로도 그러고 싶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또 내 착각이라면 아, 정말 인정하기 싫다. 내가 인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달라지고 싶다.


내가 나의 단점을 잘 알고 있을까. 장점도 딱히 구체적으로 얘기하기 어렵지만 단점은 더더욱 어렵다. 단점이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 이 철부지 같은 생각을 글로 기록하려니 부끄럽다. 우선은 단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 단점이겠다. 나의 추잡한 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언급했던 것처럼 은근 계산적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겉으로는 낯을 가리거나 어색한 티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할 순 있지만, 그런 분위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 새로운 자리에 합류하는 것을 아주아주 어려워하지만 겉으론 티를 안내는 것, 이는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티를 안 낼 수 있다면 편하게 마음먹을 수도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에서 그런 것 같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시원시원하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체에 속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주저 없이 의견을 말하는 편인데 내가 나를 위한 선택을 할 때는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조심성이 많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망설이고 조심해놓고, 막상 진행하고 나면 만족하고 부러워하는 이상한 단점도 가졌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앞장서서 이끌어 가면 좋겠는데 그런 면모가 아주 부족한 편이다. 모르겠는 것에 대해 남이 알려줬으면 하고 기다리는 편이다.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공부하거나 숙지하지 않는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게 장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런 모습을 자각할 때마다 장점에 대해 당당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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