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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Feb 09. 2023

김훈, 『하얼빈』 리뷰

문명과 야만, 성(聖)과 속(俗)의 위태로운 자리


김훈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처음엔 그의 문장법에 매료되었으나, 지금은 익숙함을 뒤틀어 낯섦에 부딪히게 하는 전개를 좋아한다. 특히 역사를 다룬 소설은 자 대고 그은 밑줄로 빼곡하다.


   전작 『남한산성』에서는 ‘말’을 주된 소재로 침략자 홍타이지를 만주의 야만인이 아닌 절도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청의 황제로 묘사하고, 조선 왕의 의미 없는 발화를 대비했다. 바깥으로부터 무너지는 조선의 성벽보다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말의 싸움을 그려냈다.


   또 다른 전작 『흑산』에서는 신유박해 이후 ‘믿음’을 주된 소재로, 세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없으니 세속 밖 흑산도에 기거하는 정약전, 세속이 천주 신앙을 박해하니 또 다른 세속 국가에 군함을 보내달라 요청하는 그의 사위 황사영, 이도 저도 없이 ‘오늘은 맞지 않게 하소서’ 비는 민초들을 대비했다.




   『하얼빈』 또한 잘 알려져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한 사건을 낯설게 그려낸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름은 조선 침략의 주범이자 안중근의 총탄이 박힌 한 인물로만 떠올려진다. 그러나 그가 농민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입각해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45세에 초대 총리가 되었던 인물이며, 정계 은퇴 후 맡은 마지막 직책이 한국의 통감이란 사실은 생소하다. 이토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성되어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단지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권총 한 자루를 들고 기차를 탈 여비가 없어 옛 친구로부터 백 루블을 강제로 빌린 젊은이였다. 안중근은 충동적이고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이토와 순종 황제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고 그 즉시 이토를 죽이기로 결심해 길을 떠난다. 그러면서도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이 마음에 걸려 머뭇거린다.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극명히 대비되는 두 인물을 두고 어느 것이 문명이고 질서이며, 어느 것이 폭력이고 야만인지 묻는다. 안중근이란 인물을 그저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이토 히로부미를 그저 무자비한 침략자로 막연히 알고 있을 때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며, 질문을 던지니 비로소 안중근의 행동이 문명과 질서에 속해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이토의 죽음과 안중근의 체포 이후에는 또 다른 대비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흑산』에서 그린 것과 닮은 성(聖)과 속(俗)의 충돌이다. 안중근은 세례받은 천주교인이었다.


   조선 교구의 주교 뮈텔(Mutel)은 안중근의 행동이 조선 땅에 겨우 자리 잡은 천주교의 탄압을 불러일으킬까 하여 그를 배격하는 반면, 황해도 주임신부 빌렘(Willhelm)은 이를 성스러운 행동이라 여겨 마지막 고해성사를 집전해준다. 성을 지키고자 속에 굴복한 뮈텔과 속의 방법으로 성을 추구한 안중근, 빌렘의 대비는 이토와 안중근의 대비와 같은 방향으로 놓인다.


   “너는 가기로 작정을 하고 나를 찾아왔구나. 나는 나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너의 영혼을 나는 가엾게 여긴다. 안중근이 일어서서 물러가려 할 때 빌렘은 돌아앉아서, 겟세마네의 예수를 향해 기도드리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역사의 일을 두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니, ‘리더의 자질’이니 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훈 작가는 다행히도 안중근이 이랬으니 너희도 이렇게 살아보라며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여줌으로 그에게 존중을 표하는 그의 방식에, 생각의 공간을 남겨둔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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